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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當奈公何’의 재해석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當奈公何’의 재해석  --------------목차 1. 서2. 공무도하가 배경설화의 해석3. 공무도하가의 배경 상황 4. 생략된 이야기의 추정5. 공무도하가의 올바른 의미 추정6. 결 ----------------------- 기존 연구는 공(公)이 황하를 건너지 못하고 익사하였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배경설화 원문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된 전제 하에 기존 연구는 ‘當奈公何’의 의미를 탄식으로 해석한다. ‘當奈公何’가 탄식이 되면 왜 공무도하가가 민요로 될 정도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본고에서는 중국인들이 만든 왜곡을 벗겨내고 생략한 부분을 보완하여 공무도하가가 창작된 상황을 재구성한 후, ‘當奈公何’의 의미가 ‘고통을 ..

역사 2024.09.21

고구려 왕통의 변경 (장수 3대왕 미스터리 해결)

1. 서 서진 태강 연간에 쓰여진 『삼국지』는 고구려의 왕이 본래는 涓奴部에서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桂婁部에서 나온다고 하며, 『후한서』 「동이열전」도 왕이 본래는 消奴部에서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뒤에는 桂婁部에서 나온다고 한다. 『삼국사』는 부여가 항복하니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연나부가 왕의 부였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따라서 『후한서』의 소노부보다는 『삼국지』의 연노부가 타당하다고 보인다. 고구려 초기의 왕족인 해씨는 연나부 소속이었는데, 계루부의 고씨가 정권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왕통이 변화하였다. 새로 정권을 탈취한 고씨는 새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어 고구려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왕통의 변화는 『삼국사』의 태조왕 기사에 은닉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고구려의 왕통 교체를..

역사 2024.09.13

영산강왜의 전방후원분 관련 안정준의 주장(2024.910.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반론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20244전라도 지역 고대 일본식 무덤은 한-일 민간 교류 증거 무게당연한 얘기지만, 역사학은 '한일전'이 아니다. 현재 한국·일본 양국의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주제를 통해 학술 교류와 논쟁을 이어가는 동시에, 동아시아의 역사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동반자 관계에 있다. 예컨대 근대 일제가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 피해자들을 동원한 행위가 '강제성'을 띤www.idomin.com​​전라도의 전방후원분 관련​먼저 안정준은 "고대 일본(왜)의 문화가 강하게 드러나는 고분들"이라 하면서 일본과 왜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 왜를 동일시하는 것이 강단사이비들의 가장 큰 사기이다. 일본은 백제의 별칭이었다. 일본서기의 일본..

역사 2024.09.11

장무이묘의 연대추정, 468년.

올바른 연대 추정​장무이묘의 벽돌로부터 [大歲戊在漁陽張撫夷塼, 大歲在戊漁陽張撫夷塼] 무덤을 무신년에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太歲申漁陽張撫夷塼와 使郡帶方太守張撫夷塼으로부터 묘주가 고구려 유주의 어양에서 태어나 대방태수를 지냈던 고구려인 장씨임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대방태수와 撫夷를 허구의 자칭이라고 주장하나 무덤에 허구의 관직을 적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撫夷는 고구려 왕이 위로부터 받아 준 작호이다. ​무신년은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한 이후의 무신년이다. 따라서 408년도 가능하나, 덕흥리고분의 태소래조도에 의하면 고구려는 초기 현지인을 태수로 임명하였으므로 408년으로 보기는 어렵다. ​위는 488년과 490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이후 쇠락의 과정을 겪는다. 또한 523년에는 ..

역사 2024.09.10

강단사이비의 서북한 기년명 벽돌 연대 추정의 사기성

주석은 위 화일에만 나옵니다.​   강단사이비의 서북한 기년명 벽돌 연대 추정의 사기성  1. 서  강단유사사학과 강단유사고고학은(이하 ‘강단사이비’라 한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의 주체를 중국인이나 중국계 이주민이라 주장하며 벽돌에 사용된 연호를 중국 왕조의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엔 일제·중제유사사학의 소설을 향한 무한한 충성심 외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   2. 강단사이비의 연대 추정 광화5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182년(후한 靈帝 光和 5년)흥평2년명 전, 평안도 대동군, 195년(후한 獻帝 興平 2년)정시9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48년(조위 齊王 正始 9년)가평2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50년(조위 齊王 嘉平 2년..

역사 2024.09.10

일본서기 사료비판과 관련한 임동민의 주장(24.9.2.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반론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19665복어를 닮은 일본 역사책, 독이 있다고 버려야 할까복어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맹독을 품고 있지만, 자격 있는 전문가가 독만 제거하면, 맛있는 요리로 재탄생한다. 역사책 중에도 '독이 든 복어'로 비유되는 책이 있다. 일본 고대사를 기록한 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는 8세기 일본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찬한 역사책이다. 당www.idomin.com​​임나는 가야인가?​임동민은 일본서기는 "고대 한일 사이 다양한 사건 기록돼 있으나 일왕 중심 과장ㆍ왜곡'이중 굴절ㆍ연대 불분명' 한계 주의해 연구에 활용하면 중요 자료"라고 말하면서 "경남 일대에 있던 가야 여러 나라의 역사가 에 많이 들어갔다."..

역사 2024.09.05

진경대사를 왜인 후손이라 보는 건 '자의적 비문 곡해'라는 이근우의 주장(24.8.26.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반론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19138진경대사를 왜인 후손이라 보는 건 '자의적 비문 곡해'2021년부터 진경대사 심희가 왜인의 후손이라는 설이 퍼져나가고 있다. 그 발단은 에 실린 가야불교연구소장 승려 도명이 기고한 글이 아닐까 한다. 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는 보물로 지정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고, 진경대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창원 봉림사를 창건하신 분이다. 이 비문www.idomin.com​​1. 도명이 진경대사를 왜인이라 하였는가?​이근우는 도명이 진경대사를 왜인이라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도명은) 진경대사의 조상이 임나의 왕족인 초발성지라고 주장했다. 초발(..

역사 2024.09.04

유사역사학이 가야사 연구 방해한다는 조법종의 주장(24.8.12.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반론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18314'일본서기' 인용하면 무조건 식민사관? 따져보면 사실 아냐지난해 9월 유네스코가 국내 7개 가야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가야사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습니다. 오는 9월 김해에 국립가야역사문화센터도 개관을 앞두고 있습니다. 가야고분군이 속한 10개 광역·기초지자체로 구성된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통합관리지원단도 세계유산인 가야사의www.idomin.com​​1. 조법종의 토론 수준 조법종은 그의 글 처음부터 끝까지 인신공격을 하고 있다. ​-------------------- 와 등 지역사 서술 내용 중 를 활용해 가야 및 마한의 국명과 지명 위치를 한반도 지역에 비정(비교하여 정함)한 것에..

역사 2024.09.04

경인명도가 증명하는 백제의 열도 지배

주석을 보기 위해선 첨부 화일을 보아야 함  1. 서 연민수는 구주에서 출토된 경인명도가,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전사할 당시 지원군으로 파병된 야마토왜 정권의 북구주 호족인 축자화군(筑紫火君)에게 위덕왕이 보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민수의 글은 논문으로서의 기본적 형식도 갖추지 않고 있으며, 그의 주장은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연민수는 야마토왜 정권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으나 이 칼은 열도가 백제의 영토였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의 하나로 드러난다.  2. 연민수의 글은 논문 형식을 갖추었는가? 띄어쓰기는 연민수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띄어쓰기법에 의해 작성한 것 같아서 언급하지 않겠다. 그만의 독창적 띄어쓰기법을 활용한다면 독자를 위해 그가 행하는 방법의 개요라도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

역사 2024.09.04

태화13년명 석조불상

위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울산시 삼동면 직동리에서 출토되었다. 강단유사사학은 이 석불을 고구려의 것이라 주장한다. 근거는 말하지 않아 알 수 없는데, 아마 고구려가 위의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그런 것 같다.  --------------------우리역사넷: 먼저 고구려 불상으로 대화13년명(大和十三年銘) 석불상은 공덕이 칠세 부모에게 미치고 중생이 모두 함께 악도를 떠날 것을 기원하며 조성하였다는 명이 있다.(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11_0030_0050_0020&whereStr=)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불상명-대화 13년명 석불상 해제대화 13년명 석불상은 일간지가 기록된 삼존석불상으로 동아..

역사 2024.08.24

고구려의 태녕(泰寧, 太寧) 연호

태녕(泰寧, 太寧) [소수림왕, 374-384] 태녕이라는 연호는 집안의 태녕(太寧)4년명 기와 두점과 황해도 복우리 2호분의 태녕(泰寧)5년명 벽돌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기와 한점의 명문이 “太寧四年太歲□□閏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로 확인되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집안은 343년 처음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된다. [강단유사사학은 집안 평지성이 국내성으로 유리왕이 정한 수도이고, 집안 산성이 환도성이라 하는데, 집안 산성의 기와는 5세기의 것이라 하고, 집안 평지성의 축성연대가 320년 이후라 하여 그들의 주장에 전혀 근거가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태녕명과 같은 권운문 기와가 집안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데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집안이 343년 수도가 되고, 집안에서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역사 2024.08.23

일제유사사학의 심리

미국인은 과거에 미국이 영국을 지배했다고 하지 않고, 자신들이 유럽에서 온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다. 미국인은 자유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스스로 왔던 사람들이므로 영국인에 열등감이 없다. 일본인들도 자신들이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왜 일본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지 못할까? 야마토임나설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논리라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은 거짓이라 탄로날 것이 뻔한 논리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원래 우리가 살던 땅인데 전쟁에 져서 쫓겨났으므로 다시 되찾겠다고 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명분이 있다. 조선인을 지배하기 위한 통치수단으로 보기도 어렵다. 여기서도 원래 조선 사람들이 쫓겨났다가 다시 조선으로 와서 통치한다고 하는 것이 통치수단으로서 더 효율적일 수 ..

역사 2024.08.19

飛鳥문화(아스카 문화)와 白鳳문화(하쿠호 문화)는 각각 백제와 신라의 문화

동경대학의 역사 교과서인 「일본사개설」은 성덕의 섭정기라 주장하는 593년부터 621년까지 아스카 지방에 있었던 문화를 아스카문화라 한다. 일제유사사학은 대화개신 이후 710년까지를 하쿠호문화라 한다. 그러나 아스카문화는 백제의 문화이고 그 하한 시기는 대체로 668년경이며, 하쿠호문화는 신라의 문화이며 아스카문화 이후부터 7세기 말까지이다. 즉 각각의 문화는 백제와 신라 지배 하의 문화이다. 일제유사사학은 아스카문화가 그리스, 사산조 페르시아, 북위, 북주문화가 집결하여 이루어진 문화라고 하며 백제의 문화임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제유사사학은 호류지 소장품 중, 하쿠호 문화재의 하나인 법륭사 금당벽화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밖의 호류지 소장품은 아스카문화에 속한다고 주장하나, 현..

역사 2024.08.19

대화개신은 날조된 사건이다

「일본서기」는 소아입록(蘇我入鹿)이 살해된 다음 해 효덕이 대화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하였다고 한다. 대화개신의 지시 1조는 한서(漢書)와 동일하고, 2조는 757년 시행된 양로령(養老令) 가운데의 양로호령 양로선서령 양로공식령과 동일하고, 3조는 양로호령 양로전령과 동일하며, 4조는 양로부역령과 동일하다. 또 1조의 식봉(食封)과 2조의 군사(郡司)는 757년 양로령에 의해 비로소 제도화된 것이다. 즉 대화개신은 조작된 기사이다. 일제유사사학은 대화개신의 지시문이 645년 이전의 야마토왜 지방조직을 아는 유일한 문헌이라 주장한다. 즉 대화개신의 지시문을 부정하면, 7세기 국가로서의 야마토왜는 그 존재 기반을 상실한다. 그래서 일제유사사학은 지시문 자체는 당시의 것이지만 문장은 그 뒤의 것이라는 이상한 주..

역사 2024.08.19

성덕(聖德)은 가공의 인물이다

일제유사사학은 야마토왜정권을 날조하기 위해 성덕(소위 성덕태자)을 창조하였다. 「일본서기」의 천황들이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은 일제유사사학도 알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천황은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가 있다. 제1대부터 제15대까지 대체로 천황이 100세 이상이다. 또한 천황의 수명은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나왔다는 「고사기」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1대부터 30대까지 천황권의 공위 시기가 13번이나 있으며 그 기간도 11개월에서 12개월이 4번, 1년에서 2년이 5번, 2년에서 3년이 2번, 3년에서 4년이 2번이다. 29대 흠명의 자녀 4인이 연이어 왕위에 올라 56년을 지배하며, 33대 추고의 나이를 576년 18세라 하였다가 586년 34세라 하는데, 이는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34대 ..

역사 2024.08.19

예맥조선(위만조선)은 漢나라 북동쪽에 있었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漢나라가 예맥조선의 북쪽에 있었다고 하면서 漢에 망하는 예맥조선의 왕검성은 현재의 평양이라 사기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위만은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도주하였으며, 진한 교체기에 예맥조선에 중국인 망명자들이 모여들자 준왕은 이들을 서부에 살게 하였으며, 위만도 서쪽에 거주하게 해주면 서쪽을 지키는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예맥조선이 한반도 내라면 서쪽을 지킨다는 것은 바다를 지킨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기』 「흉노열전」은 BCE 200년 경 흉노의 상황에 대해 “모든 좌방의 왕과 장수는 동쪽에 위치하여 상곡을 지난 동쪽을 맡아 예맥조선에 접했다”라고 한다. 『사기』 「흉노열전」은 “이때 한(漢)은 동쪽으로는 예맥조선을 공격하여 군으로 삼았다”고 한다..

역사 2024.07.31

선진 시기 문헌에서 동이는 중국 동부의 번한 번조선을 일컫는다

강단유사사학이 위서라 주장하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남국 기술이 『후한서』와 일치한다. 『규원사화』는 탕왕 때 후퇴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이 부분도 『후한서』와 일치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후한서』가 우리 사서라면 날조라 주장했을 텐데 중국 사서여서 그러지도 못한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후한서』가 중국 동부를 동이의 땅이라 하고, 『삼국지』와 『후한서』가 삼한이 방 사천리라 하므로 그에 부합하게 추론할 것이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날조에 날조를 거듭하고 억지에 억지를 거듭하여, 한민족은 BCE 12세기에 석기시대를 벗어나 BCE 7세기에나 요동에서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되지만 진개에 의해 평양으로 쫓겨났다가 漢의 식민지가 되고, 한반도 남부는 4세기까지 70여개 소국이 있었다가 왜의 식민지가 되..

역사 2024.07.28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

무왕은 사택씨 등 부여의 귀족 세력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였던 익산으로 천도하였다. 「관세음응험기」에 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신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익산의 왕성과 제석사 유적, 제석사 명문 기와가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을 증명한다. 익산 쌍릉 중 대릉은 매장된 인골 분석상 무왕릉으로 추정된다. 『삼국사』는 무왕 시, 사비와 왕도를 구별하고 있어, 왕도는 익산임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임에도 무왕 33년 즉 632년에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된다. 이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백제의 귀족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왕 사후 백제는 다시 사비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삼국사』는 의자왕 시 사비가 왕도임을 명시하고 있다.백제의 주된 왕도였던 서도 한성과, 서도 한성 ..

역사 2024.07.28

문주왕이 천도한 웅진은 황하 동쪽

문주왕이 475년 천도한 웅진은 韓의 웅진이다. 문주왕은 천도 이듬해인 476년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대두산성은 온조왕이 마한을 CE 8년 멸망시킨 직후인 CE 9년 쌓은 성이므로 韓 지역에 있는 성이다. 마한을 멸망시킨 후 1년만에 한반도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두산성은 웅진 북쪽이며 한수 이북과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웅진이 수도가 되었으므로 웅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시켜야 하며, 주민을 멀리 이동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웅진을 한반도 웅진으로 보며, 대두산성을 주로 아산 일대로 보는데, 이는 소설에 불과하다. 한수 이북의 주민을 아산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공주 남쪽의 산성을 강화하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대..

역사 2024.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