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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當奈公何’의 재해석

역사회복 2024. 9. 2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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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當奈公何’의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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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국문초록>

1. 서

2. 공무도하가 배경설화의 해석

3. 공무도하가의 배경 상황

4. 생략된 이야기의 추정

5. 공무도하가의 올바른 의미 추정

6. 결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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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기존 연구는 공(公)이 황하를 건너지 못하고 익사하였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배경설화 원문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된 전제 하에 기존 연구는 ‘當奈公何’의 의미를 탄식으로 해석한다. ‘當奈公何’가 탄식이 되면 왜 공무도하가가 민요로 될 정도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본고에서는 중국인들이 만든 왜곡을 벗겨내고 생략한 부분을 보완하여 공무도하가가 창작된 상황을 재구성한 후, ‘當奈公何’의 의미가 ‘고통을 당할 때 公께선 얼마나 아프셨나요?’임을 밝혔다. ‘當奈公何’는 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지극한 사랑과 공감이다.

 

주제어: 공무도하가

 

 

 

1. 서

기존 연구는 공(公)이 황하를 건너지 못하고 익사하였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 가정은 배경설화 원문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된 전제 하에 기존 연구는 ‘當奈公何’의 의미를 탄식으로 해석한다. ‘當奈公何’가 탄식이 되면 왜 공무도하가가 민요로 될 정도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본고에서는 중국인들이 만든 왜곡을 벗겨내고 생략한 부분을 보완하여 공무도하가가 창작된 상황을 재구성한 후, ‘當奈公何’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2. 공무도하가 배경설화의 해석

 

채옹, 공연, 최표가 기록한 배경설화 중, 공(公)이 황하를 건넌 후에 죽었는가, 아니면 황하를 건너기 전에 죽었는가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① 채옹의 『琴操』

ㅇ 『예문유취』: 子高晨刺船而濯 有一狂夫 被髮提壺而渡 其妻追止之 不及 墮河而死.

② 공연의 『琴操』

ㅇ 『초학기』: 有一征夫 被髮提壺 涉河而渡 其妻追止之 不及 墮河而死

③ 최표의 『古今注』

ㅇ 『악부시집』: 子高晨起刺船 有一白首狂夫 被髮提壺 亂流而渡 其妻隨而止之 不及 遂墮河而死

 

1) 기존의 견해

기존의 견해는 『예문유취』의 ‘渡’를 ‘건너려고 하였다’로 해석하고, 『초학기』의 ‘涉河而渡’를 ‘涉河而渡하고 있었다’로 해석하고, 『악부시집』의 ‘渡’를 ‘건너고 있었다’로 해석한다. 기존의 견해는 ‘渡’를 ‘건너려고 하였다’ 또는 ‘건너고 있었다’로 해석하면서, 예외 없이 公이 황하를 건너는 중에 익사하였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公이 익사하였다면 모든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곽리자고는 公이 미친 사람인지 여부를 떠나 그를 구하려고 했어야 하고, 公의 아내는 곽리자고에게 소리쳐 제발 公을 구해달라고 했을 것이며, 公의 아내가 강물에 투신했을 때 곽리자고는 公의 아내라도 구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 어떤 미쳤을 수도 있는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 죽기 전에 남편에게 물에 들어가지 마라고 말한 내용의 노래(시)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이민족도 감동할 만한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公이 황하에 들어가 자살과 유사하게 익사하였는데, 그 아내가 따라 죽었다면, 많은 사람들은 슬픔이나 공감 이전에, 왜 따라 죽어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더구나 미친 사람이라면 그러한 의문은 더 증폭되고, 그 아내의 죽고 싶을 정도의 슬품이나 죽을 결심에 대한 공감은 더더욱 약화될 것이다.

公의 죽음에 대한 공감이 먼저 있어야, 그 아내의 따라 죽음에 대한 공감도 성립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야 그 아내가 노래한 ‘공무도하’의 간절한 외침과 公이 죽은 후의 아내의 절망과 죽음이 민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연구는 저질 드라마처럼 이야기 전개의 필연성도 전혀 없으며, 공감할 수 있는 어떤 상황적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 연구는 공감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은 후, 그래도 공무도하가가 민요로서 성립할 수 있었던 이유로서 주술적 제의적 의미를 제시하기도 하나, 주술이나 제의도 민중의 광범한 공감에 기반해야 하므로, 이들이 제시하는 주술적 제의적 의미는 근거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公이 생업을 위해 황하를 건너려 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 ‘公’이라는 글자가 사용될 수 없고, 생업을 위해 항상 황하를 건너고 있었다면, 그 부인이 물가까지 나와서 간절하게 황하를 건너지 마라고 할 상황도 발생하기 어려우며, 이 경우 곽리자고의 방관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게 된다.

 

2) 올바른 해석

渡는 ‘건너다’란 의미이다. ‘건너려고 하였다’란 의미가 되려면 ‘欲渡’로 써야 한다. ‘건너고 있었다’의 의미가 되려면 ‘渡河中也’로 써야 한다. 뒤에 公의 아내가 저지하지 못했다고 하므로 여기서 渡는 ‘건넜다’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기존 견해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강을 건너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초학기』는 ‘涉河而渡’라 하여 ‘건넜다’란 의미를 명확히 하고 있다. 涉도 건너다란 의미가 있는데 ‘지나다’ ‘거치다’ ‘겪다’ ‘(걸어서) 돌아다니다’의 의미가 있어 구체적으로 건너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따라서 ‘涉河而渡’는 ‘황하를 (壺를 지니고) 헤엄쳐 건넜다’로 해석할 수 있다. 『악부시집』은 ‘亂流而渡’라 하는데 ‘涉河而渡’와 비슷한 의미일 것이므로 ‘물살을 헤치고 건넜다’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壺는 당연히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이다.

그리고, 公은 墮河而死 즉 황하에 떨어뜨려져 죽었다. 墮의 의미는 ‘떨어뜨리다’이다. 그는 황하를 건널 정도의 체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황하를 건넌 후에, 자의나 실수로 황하로 떨어질 이유나 가능성은 없다. 그는 황하를 건너간 목적을 위해 노력하다가, 남에 의해 황하로 떨어뜨려진 것이다. 公이 황하를 건너는 중에 죽었다면 그는 溺河而死해야지 墮河而死할 수는 없다.

 

3. 공무도하가의 배경 상황

 

후한까지 河는 황하를 의미하였다. 『사기』는 물론 『한서(漢書)』의 河도 거의 예외 없이 황하를 가리킨다. 후한의 학자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도 河는 황하를 나타내는 글자로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공무도하가의 지리적 배경은 황하 중류에 연접한 조선의 소국이다. 당시 황하 하류는 바다처럼 넓었으므로 사람이 헤엄쳐 건너갈 수 있는 곳은 황하 중류로 보아야 한다.

기자는 조선으로 갔는데, 그의 무덤이 하남성 상구에 있다. 즉 중국 동부는 번조선이었다. 周가 商을 멸한 후, 여상(강태공)을 齊 영구(營丘)에 봉하였는데, 成王 시 번조선인들이 관숙과 채숙의 반란에 가담하자 주공이 영고씨(淮)와 박고씨(奄)를 진압하면서, 제나라 주변의 번조선은 제나라가 정벌하도록 하였다. 제나라가 조선의 소국들을 정벌한 결과 춘추시대 제나라는 제장성을 경계로 제장성 북쪽의 번조선과 대치하였다. 제장성 남부가 제나라인 것은 양보와 낭야 등 팔신 제사지의 위치가 제장성 남쪽이기 때문이다.

 

[산동성 박물관의 제장성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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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E 8-7세기에 산동성 북부의 조선은 제나라 연나라 노나라와 싸우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사서에 산융과 북융으로 기술되어 있다. 『사기』 「흉노열전」은 BCE 707년 산융이 연나라를 넘어 제나라로 침입하였고, BCE 663년 다시 연나라를 침입하여 제나라와 산융이 싸웠다고 한다. 산융이 BCE 707년 제를 침입한 사실을 「제태공세가」에서는 북융이 제나라를 침공했다고 하여 북융이라 기술하고 있다. 『춘추좌전』도 북융이라 하여 이를 기록하고 있다. 「흉노열전」에 기록된 BCE 663년의 연 침입에 대해서도 『춘추좌전』에 산융이 연나라를 쳐서 노와 제가 의논했다고 동일하게 기술되어 있다. 산융이 연나라 북쪽의 나라라면 연나라를 멸망 시켜야 제나라를 침공할 수 있으므로, BCE 707년과 663년 제나 연을 침입하는 나라는 산동성 북부의 번조선이다. 산융=북융이 산동성 북부여야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고, 연나라를 공격할 때 제나라와 노나라가 의논하는 것이 필요하다. 번조선이 연나라 남쪽을 치니까, 제와 노가 자기들도 위험해질까봐 번조선을 협공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주나라 이후 중국 동부의 번조선과 중국의 나라들은 계속하여 전쟁을 했다. 중국 동부의 번조선은 전국시대 말까지 대부분 중국 왕조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공무도하가는 이 당시의 전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노래이다.

공무도하가의 河를 황하로 해석하면 공무도하가가 중국의 노래가 된다는 주장이나, 공무도하가의 河가 황하가 아닌 대동강, 요하, 혹은 조백하라는 주장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견해에 불과하다. 조선의 영토였으나 나중에 중국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공무도하가는 후한 때 민요로서 채록될 수 있었다. 공무도하가를 유철의 예맥조선(위만조선) 정복과 관련하여 예맥조선의 영역을 배경으로 한다는 견해는 예맥조선이 황하 중류 옆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4. 생략된 이야기의 추정

 

공무도하가 배경설화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위에서 밝힌 공무도하가의 상황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狂夫에 초점을 맞추어 글자의 뜻을 무시하고 狂夫가 溺死하였다는 가공의 사실을 창작하였다. 그 결과 공무도하가는 이해할 수 없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중국인들은 공무도하가를 채록하면서 그 배경을 상세하게 기술할 수 없었다. 공무도하가는 조선인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노래였다. 적국의 잔학무도한 행위에 비분강개한 公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복수하기 위해 황하를 건너 적진에 돌격하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살해 당하고 황하에 던져졌다. 남편의 성격을 알고 있었던 그의 아내는 제발 강을 건너 적진으로 가지 마라고 애원하였지만 남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강 건너에서 남편이 적들에게 살해 당하는 것을 보고 있었던 아내는 불쌍한 남편과 함께 하기 위해 남편을 뒤따라 갔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적국의 승계자인 후한이 제대로 기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황을 왜곡하여 설명하고, 公이 황하에 떨어뜨려져 죽었다고만 기술하였다. 중국 왕조에 대항한 적군의 영웅담이고 적군 부부의 사랑 이야기이므로 실제 이야기를 다 삭제하고 모호하게 기록하였다.

公이 황하를 건넌 배경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적국의 침략이 있었고 公이 황하를 건너기 전 적은 이미 황하를 건너 도망갔다. 적군이 임금이나 태자를 살해하였을 수 있다. 아니면 적이 극악무도하게 조선인들을 죽였고 그 과정에서 公의 부모 형제나 자식이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우직하고 충성스런 公에게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 준 사건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전열을 정비하여 적국에 보복하려고 결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公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公이 당장 황하를 건너 적을 공격하면 죽게 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公은 자신을 희생하여 조선인들의 사기를 높이려 하였을 것이다. 公은 배가 한 척이라도 더 조선의 공격 시 사용될 수 있도록 배를 타고 가지 않았다. 적국이 강하므로 公은 자신의 죽음을 밑거름으로 하여 조선이 승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公이 죽으러 가는 길에 公과 생사를 같이 하는 부하 몇 사람이 동행하였을 것이다. 有一狂夫는 중국인들의 날조이다.

津卒 곽리자고는 적을 공격할 때 쓸 배를 고르고 있었다. 『예문유취』의 ‘子高晨刺船而濯’나 『악부시집』의 ‘子高晨起刺船’은 곽리자고를 公이나 그 부인과 무관한 제3자로 만들기 위한 왜곡으로 추정된다. 곽리자고는 물론 그 때 公의 행위를 보고 있었던 모든 조선인들은 公의 행위의 의미를 알고 있었고, 그 아내의 간절한 ‘공무도하’의 외침에도 지극히 공감하고 있었다. 公이 살해된 후 그 아내가 자살할 때 곽리자고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부인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부인의 公에 대한 사랑과 公과 함께 하려는 마음이 공무도하가로 표현되었으므로 그를 보내주었을 것이다.

 

5. 공무도하가의 올바른 의미 추정

 

『초학기』는 ‘公無渡河 公竟渡河 渡河而死 當奈公何’라 하며, 『악부시집』은 ‘公無渡河 公竟渡河 墮河而死 將奈公何’라 한다. 『초학기』의 것이 원문으로 추정되고, 『악부시집』의 것은 창작 배경에 대한 오해로 인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초학기』의 공무도하가

公無渡河: 公이시여, 제발 황하를 건너지 마세요

公竟渡河: 公께선 끝내 황하를 건너가시네요

渡河而死: 황하를 건너 먼저 가시네요

當奈公何: 고통을 당할 때 公께선 얼마나 아프셨나요?

 

기존의 해석은 ‘當奈公何’를 ‘가신 公을 어찌할까’의 의미라 주장하며 해석이 아닌 창작을 하고 있다. 각 글자의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내용이 도출되었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을 “어찌할까”라고 말할 리도 없고, 그러한 말에 큰 감동을 느낄 사람도 별로 없다. 공무도하가의 창작 배경을 모르면 이 문구를 해석할 수 없다. 그래서 『악부시집』은 글자의 뜻이라도 통하게 當을 將으로 바꾸어 ‘장차 公을 어찌할까’로 변형하고 있다. 『악부시집』의 墮河而死도 사실을 전달하는 즉 ‘황하에 떨어뜨려져 죽었다’의 의미만 있고, 公의 아내가 하기 어려운 말이다. 공무도하가의 배경을 모른 상태에서 공무도하가의 내용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만들기 위해 변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渡河 즉 황하를 건넜다면 죽는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渡河를 墮河로 변형시켰다. 따라서 기존 해석은 모두 공무도하가의 핵심을 놓치고 해석자들이 창작을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當奈公何는 기존 해석이 주장하는 탄식이 아니다. 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지극한 사랑과 공감이다. 이제 부인은 公이 황하를 건넌 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라에 충성하는 公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렇지만 公이 겪었던 고통이 가슴 아팠다. 公의 고통(奈)은 적들의 침략 시에 당한 것일 수도 있고, 황하를 건너간 후에 당한 고통일 수도 있고, 둘 모두를 말할 수도 있다. 公이 당한 고통이 무엇이었건, 부인은 그 모든 고통을 함께 느꼈다. 그래서 부인은 當奈公何라 하였다. 當奈公何로 인해 주변 사람들은 부인을 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는 부인이 公과 죽음까지도 같이 하고자 하였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조선인들은 公과 그 부인의 죽음을 자신의 일처럼 슬퍼하였다. 그래서 민요가 되었고, 황하 중류 옆의 조선에 속한 한 나라가 중국에 정복된 후 중국인들도 公의 충절과 그 아내의 지극한 사랑에 감동하여 이 노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6. 결

 

중국 동부는 조선의 영토였다. 그래서 선진 시기 문헌에서는 중국 동부의 조선인들을 동이라 하였다. 주나라 이후 전국시대까지 중국 동부의 조선은 점차 쇠퇴하여 사라졌다. 공무도하가는 황하 옆에 있었던 조선인들의 소국에서 만들어졌다. 기존 견해는 중국 동부의 조선과 중국 왕조 사이 전쟁의 역사를 몰랐기 때문에 배경설화를 오독하고, 공무도하가의 내용도 창작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역사를 알았다면, 민요의 채록 시 중국 왕조의 관점에서 왜곡될 수 있음을 추정할 수 있고, 진실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문화는 역사적 배경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만든 소설을 역사로 받아들이는 한 우리의 고전 시가에 대한 연구는 고전을 핑계로 창작하는 수준을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참고문헌>

 

『예문유취』, 『초학기』, 『악부시집』

『설문해자』, 『사기』, 『춘추좌전』

 

구본현, 「<公無渡河歌>에 나타난 仁의 형상」, 『고전문학연구』제51집, 한국고전문학회, 2017. 5-34쪽.

金長煥, 「古今의 名物에 대한 考證 -崔豹의 古今注에 대하여-」, 『중국어문학논집』103, 중국어문학연구회, 2017. 313-337쪽.

리규배,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재고(再攷) 시론(試論) - 歌·樂·舞 文獻記錄들로부터의 循環的 解釋學 -」, 『어문연구』45권 2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7. 181-210쪽.

조성훈, 『한상고사』, 북랩, 2023.

 

 

<Abstract>

 

A Reinterpretation of 'Dangnaegongha(當奈公何)' in Gongmudohaga

 

Previous studies have assumed that Gong(公) was unable to cross the Yellow River and drowned. However, this assumption does not align with the original background story. Based on this flawed premise, existing research interprets the phrase '當奈公何' as an expression of lament. If '當奈公何' is indeed a lament, it becomes difficult to understand why Gongmudohaga gained such widespread popularity as a folk song. In this paper, by removing Chinese distortions and supplementing the omitted parts, I reconstruct the situation in which Gongmudohaga was created. It reveals that the phrase '當奈公何' means 'How much pain did you(Gong) suffer when faced with such hardship?' ‘當奈公何’ is an expression of deep love and empathy, feeling Gong’s pain as one’s own.

 

Keyword: Gongmudohaga(公無渡河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