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왕통의 변경 (장수 3대왕 미스터리 해결)

역사회복 2024. 9. 1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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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

 

서진 태강 연간에 쓰여진 『삼국지』는 고구려의 왕이 본래는 涓奴部에서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桂婁部에서 나온다고 하며, 『후한서』 「동이열전」도 왕이 본래는 消奴部에서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뒤에는 桂婁部에서 나온다고 한다. 『삼국사』는 부여가 항복하니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연나부가 왕의 부였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따라서 『후한서』의 소노부보다는 『삼국지』의 연노부가 타당하다고 보인다.

고구려 초기의 왕족인 해씨는 연나부 소속이었는데, 계루부의 고씨가 정권을 탈취하여 고구려의 왕통이 변화하였다. 새로 정권을 탈취한 고씨는 새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어 고구려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왕통의 변화는 『삼국사』의 태조왕 기사에 은닉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고구려의 왕통 교체를 『삼국사』 등 관련 사료를 통해 입증하고자 한다.

 

2. 선행 연구

 

추모왕 시 변경되었다는 견해는 송양의 ‘양’이 ‘노(奴)’ 혹은 ‘나(那)’와 통한다고 여겨, 이를 특정 왕의 이름이 아니라 소노부(消奴部)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주몽이 송양과 다퉈 승리하는 일화는 주몽으로 대표되는 계루부와 송양으로 대표되는 소노부 사이의 대립 결과, 계루부가 승리하여 일대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고구려의 송양 정복은 고구려 내부의 권력 변경으로 볼 수 없어 이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이 견해는 일제의 가짜음상사 기법을 추종하여 소설을 역사로 만드는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김용선은 고구려는 유리왕이 창업한 나라로 유리왕부터 모본왕까지는 연노부의 해씨이고, 태조왕부터는 계루부의 고씨라 하면서, 계루부가 계루부 고씨의 조상인 추모를 연노부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으로 올려 고구려의 개국시조로 삼았다고 주장하며, 추모와 태조왕을 태조왕 때에 함께 기술하여 태조왕의 재위 시기가 늘어났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역사서와 건국설화에 등장하는 추모왕의 창업을 부정하므로 소설에 불과하다.

유리왕의 국내 위나암 천도를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교체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유리왕은 천도를 하지 않고 있다가 왕망에 의해 살해 당하므로 소설에 불과하다.

해씨 소노부에서 고씨 계루부로의 왕실 교체가 태조왕 시 있었다는 견해는 모본왕의 죽음과 태조왕의 즉위 사이에 단절 현상이 보인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단절은 모본왕의 죽음과 태조왕의 즉위 사이에 있지 않고 태조왕 기사의 중간에 았다. 그리고 이 견해는 태조왕의 과다한 재위기간과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의 과다한 수명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따라서 현재까지 어느 견해도 연나부에서 계루부로의 왕통 교체를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본고는 『삼국사』 등 객관적 사료를 기반으로 왕통 교체의 전말을 합리적이고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3. 해씨에서 고씨로의 변경

 

1) 변경의 시기와 배경

태조왕 기사는 태조왕 26년(CE 78년)부터 45년(CE 97년)까지 20년 동안 비어 있다. 이 기간 중에 해씨의 연나부 정권에 대한 무뢰배인 태조왕 집단의 공격이 있었다. 무뢰배가 고구려의 왕권을 장악하였다. 무뢰배가 어떻게 왕권을 꿈꾸고 왕권 장악에 성공하였는지는 20년 동안의 역사 삭제로 알 수 없다. 태조왕 25년까지의 기사는 태조왕의 기사가 아니라 모본왕의 태자 익(翊)(이하 ‘익왕’이라 한다) 재위 시의 기사이다. 요서에 10성 설치, 동옥저 정벌, 갈사국의 항복, 조나와 주나의 정벌 모두 익왕의 업적이고 태조왕과는 무관한 일이다.

 

2) 태조왕의 출신

태조왕 집단은 계루부 내의 무뢰배이다. 계루부의 수장급이 아니다. 태조왕 집단은 고대국가가 경영되는 것을 옆에서 보거나 주워들은 적도 없는 무뢰배이다. 성도 없었을 것이다. 왕권 장악에 성공하자 성의 필요를 느껴서 고씨로 하였거나 후세 왕이 고씨라 정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해씨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물론, 계루부의 수장급도 아니다. 이들은 고구려 대신 새 나라를 건국할 능력도 없었다. 이들은 그저 대왕놀이를 하였다. 따라서 연나부에서 계루부로 왕통이 교체되었다기보다는, 연나부 해씨로부터 무뢰배인 태조왕 집단으로 왕권이 이전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즉 태조왕 집단을 계루부와 연결 시킬 특별한 이유는 없다.

 

3) 왕통 교체의 은폐

후세의 고구려 왕은 자신들이 태조왕의 후손이지만 고구려의 왕으로서 정통성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태조왕을 추모왕과 연결 시키려 하였다. 이를 위해 역사에 거짓을 추가하였다.

 

① 혈통의 연결과 추모왕 성 변경

우선 태조왕의 혈통을 유리왕에 연결시켰다. 즉 태조왕이 유리왕(珫璃王)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라 하였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추모왕의 성을 고씨로 변경시켰다. 『삼국사』는 위조된 고씨설을 취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따라서 고씨로 성을 삼으니 본래의 성은 해씨였는데 이제 천제의 아들로서 햇빛을 받고 낳았다 하여 자신이 높을 고자로 성을 삼았다.”라고 하는데, 이는 후세 왕이 추모왕 성을 변경하면서 만든 거짓말이다. 후세 왕은 추모왕이 원래는 해씨였지만 추모왕 자신이 성을 고씨로 변경했으므로 자신들은 추모왕의 혈통이라 거짓말하고 있다.

 

② 익왕 은폐

고구려는 민중왕과 모본왕 시 장지명을 사후 왕호로 하였다. 따라서 익왕이 천수를 다하였다면 익왕의 장지를 토대로 사후 왕호가 정해졌을 것이다. 태조왕 집단이 익왕을 살해하였고, 이들과 기존 세력 간 전쟁이 있었을 것이므로, 익왕의 장례는 정상적으로 행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후세 왕의 입장에선 익왕의 치세를 인정하는 경우 태조왕으로의 승계 과정을 기술할 때 익왕의 살해와 내전을 기술해야 할 것이므로 아예 익왕을 은폐하는 것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였을 수 있다. 그래서 모본왕 사후 태조왕이 7세로 즉위하였고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고 거짓 기사를 삽입하였다. 태조왕이 7세였다면 태조왕의 아버지라 주장되는 재사가 왕이 되었을 것이고, 만약 재사가 죽었다면 태조왕이 왕이 될 수 없을 것이어서 수렴청정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③ 모본왕 모함

익왕을 없애면 모본왕에서 태조왕으로 바로 승계되어야 하므로 모본왕을 모함해야 한다. 『삼국사』에 모본왕은 “사람됨이 사납고 흉포(凶暴)하여 어질지 못하였고, 나랏일을 돌보지 않아 백성들이 원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모본왕이 CE 49년 봄에 후한을 공격하여 태원까지 진출한 기사와 부합하지 않는다. 고구려는 이 공격으로 후한으로부터 매년 조공을 받았으므로 모본왕은 나랏일을 아주 잘 돌본 것이 된다. 또한 모본왕은 CE 49년 가을 8월에 관리를 파견하여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을 먹여 살렸다. 이러한 기사는 CE 51년 “왕이 나날이 더욱 사납고 잔인해져 자리에 앉을 때는 항상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 삼아 누웠다. 사람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고 죽였다. 신하 가운데 충고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당겨 그를 쏘았다.”라는 기사와 연결되지 않는다. CE 51년의 기사는 기술된 행위가 개연성이 없는 것이어서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CE 53년 두로의 모본왕 살해 기사도 이야기의 개연성이 없다. 왕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남의 말을 들은 후에 왕을 죽일 결심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후세 왕은 모본왕에서 태조왕으로의 승계가 정당하다는 것을 기술하기 위해 모본왕에 대한 거짓 기사를 삽입하였을 것이다.

 

4. 대왕놀이 시기의 올바른 이해

 

1) 태조왕의 사망 시기

태조왕은 실제로는 CE 78년부터 CE 97년 사이 어느 땐가 즉위하였다. 논의의 편의상 CE 90년 태조왕 집단이 정권을 완전히 탈취했다고 가정하자. 익왕을 은폐하고, CE 53년에 태조왕이 7세로서 즉위하였다고 하므로, 실제 즉위 시인 CE 90년 태조왕의 나이는 43세이다.

『삼국사』에 의하면 태조왕은 121년 11월 수성에게 군사와 나라의 일을 통괄하게 하였다. 그런데 『후한서』는 121년 태조왕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태조왕의 나이는 74세이다. 『후한서』는 전쟁 당사자인 후한의 기록을 토대로 했을 가능성이 크고, 전쟁 당사자가 적국 왕의 죽음을 잘못 파악할 수는 없다. 따라서 태조왕은 121년에 사망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삼국사』 121년 12월 “왕이 마한(馬韓)과 예맥(穢貊)의 기병 1만여 기를 거느리고 현도성(玄莬城)으로 나아가 포위하였다.”라는 기사의 왕도 태조왕의 사망을 의미한다. 여기의 왕은 수성을 의미한다. 태조왕이 74세의 고령에 친정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수성은 태조왕이 11월 사망하였지만 전쟁을 끝내고 귀환해서 전공을 명분으로 왕이 되기 위해 자기가 왕이라 하면서 12월 현도군을 공격하였지만 예부여가 을 도와 실패하였다. 전쟁 시 그는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였으므로 후한서는 수성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을 것이다.

 

2) 막근왕의 승계

수성은 태조왕의 뒤를 잇지 못하였다. 태조왕 80년(CE 132년) 수성의 측근들은 왕위 찬탈을 건의하고, 태조왕 94년(CE 146년) 7월에도 수성이 왕위 찬탈을 모의하기 때문이다. 수성은 146년 12월 즉위하였는데, 148년 태조왕의 맏아들 막근을 살해하고 막근의 동생 막덕도 자살하게 한다.

태조왕을 승계한 사람은 태조왕의 맏아들 막근이다. 즉 태조왕 69년(CE 121년) 11월부터 태조왕 94년(CE 146년) 12월까지의 기사는 막근왕의 기사를 태조왕의 기사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태조왕 집단은 왕의 생존 시 왕을 대왕이라 하였고 왕이 죽은 후에도 왕의 사후 왕호를 정하는 절차를 행하지 않았다. 태조대왕이나 국조왕은 후세 왕이 자신들의 진정한 선조를 표시하기 위해 태조왕에게 만들어준 것이다. 전부 대왕놀이만 하였으므로 태조왕도 대왕이고 막근왕도 대왕이고 차대왕도 대왕이고 신대왕도 대왕이었다. 대왕들을 구별하기 위해 후세에 수성은 ‘다음 대왕(차대왕)’ 백고는 ‘새 대왕(신대왕)’이라 구별한 것이다. 존재감이 없고 재위 시에도 수성에 눌려 지냈던 막근대왕은 대왕놀이 시대 역사 기술 체계의 허술함으로 인해 후세인들이 태조왕으로 오인하여 잊혀졌다.

막근왕을 망각하여 『삼국사』는 차대왕을 태조왕의 친동생이라 하고 즉위 시의 나이를 76세라 하였다. 그러나 차대왕은 막근왕의 배다른 동생 즉 태조왕의 서자로 봄이 타당하다. 막근왕은 적자이므로 왕이 되었으나, 병권을 쥔 수성이 무서워 다음 왕위는 수성에게 물려 주기로 하고 왕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132년 수성 측근들이 “지금 왕이 이미 늙었는데 〔왕위를〕 넘겨줄 뜻이 없으니 당신께서는 계획을 세우소서.”라고 수성에게 말한 데서 드러난다. 막근왕이 빨리 죽지도 않고 수성에게 선위하지도 않아 수성 일파는 불만을 가지고 찬탈을 모의한 것이다. 결국 146년 막근왕은 수성의 압력에 못 이겨 왕위를 수성에게 넘겼다. 수성은 막근왕이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하여 148년 막근왕 등 태조왕의 적자(嫡子)인 형제들과 그 일족을 살해하였다.

『삼국사』는 165년 태조왕이 119세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대왕놀이의 결과, 후대의 고구려 사가들은 태조왕과 막근왕을 구별하지 못하여 태조왕이 사망한 121년에 태조왕이 사망한 사실을 몰랐다. 태조왕 사망 시기를 언제로 할까 고민하다가 차대왕이 죽는 무렵 태조왕도 죽는다고 가짜 기사를 만들었다. 그 결과 신대왕이 태조왕과 차대왕을 모두 죽였다는 유언비어까지 생기게 되었다.

 

3) 차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삼국사』는 차대왕이 CE 146년 즉위 시 76세였다고 하며, 신대왕이 CE 165년 즉위 시 77세 였다고 한다. 이는 『삼국사』가 이들을 태조왕의 형제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근왕 차대왕 신대왕은 모두 태조왕의 아들이다. 『삼국사』는 막근왕이 은닉된 것을 모르고 막근왕과 차대왕·신대왕의 나이 차이를 태조왕과 차대왕·신대왕의 나이 차이로 보아 차대왕·신대왕의 나이를 계산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사』가 제시한 차대왕·신대왕 나이는 태조왕이 20여세에 막근을 낳았다면, 실제보다 20여세 높게 계산된 것이다. 막근왕의 존재를 상정하면 차대왕과 신대왕의 과다 계산된 나이문제도 해결된다. 차대왕과 신대왕은 태조왕이 정권을 탈취한 후 후궁에게서 낳은 아들이므로 『삼국사』가 기술한 나이가 결코 될 수 없다.

 

4) 위궁(동천왕)은 궁(태조왕)의 증손

『삼국사』에 의하면 산상왕이 위궁이고 궁의 조카이다. 『위서(魏書)』는 위궁은 궁의 증손이라 한다. 신대왕은 위에서 기술하였듯이 태조왕의 아들이다. 고국천왕 남무와 산상왕 연우(이이모)는 신대왕의 아들이고, 동천왕 위궁은 산상왕의 아들이다. 따라서 동천왕은 태조왕의 증손이다.

 

5) 태조왕 집단의 권력 탈취 결과

『위서』는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보았으므로 國人들이 미워하였다. 성장함에 흉악하고 사나워, 나라가 그로 말미암아 쇠잔해지고 파멸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한다. 『위서』는 태조왕 집단의 무식함과 흉포함을 정확히 기술하고 있다. 태조왕이 얼마나 많은 해씨들과 해씨 지지자들과 고구려의 지식인들을 살해했는지는 역사의 삭제로 알 수 없지만, 그 무식함과 흉포함을 보면 고구려의 국력을 갉아 먹을 정도로 많은 살인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태조왕 막근왕 차대왕 신대왕 시기는 대왕놀이하면서 권력 다툼이나 하고 영토의 확장은 전무했다. 고구려의 역량이 백년은 후퇴한 시기이다. 그 결과 후한말 혼란기였음에도 고국천왕과 산상왕은 후한 쪽으로 진출하지 못하여 공손씨에게 이 지역을 내주었고, 동천왕은 조위의 얼마 안 되는 병력에 한반도 동해안까지 쫓기는 굴욕을 경험하였다.

5. 결

강단유사사학은 총독부가 교시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시기의 의문점은 그들이 진정한 역사연구자였다면 오래 전에 해결되었을 사소한 문제이다. 그런데 그들은 음상사 놀이나 하면서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수명이 문제되면 『삼국사』의 사료가치를 말하면서 문제를 회피하였다. 조선총독부 교시에 순응하는 소설이나 쓰면서 학자인 체만 하였다. 역사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가 이 논문을 썼다는 것 자체가 강단의 유사성이 심각한 수준임을 명백히 실증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삼국유사』 『삼국지』 『후한서』 『위서』

 

金光洙, 『高句麗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硏究』, 延世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83.

金龍善, 「高句麗 琉璃王 考」, 『역사학보 87』, 1980. 45-62쪽.

조성훈, 『한상고사』, 북랩,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