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32

한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7) - 강단·일제유사사학의 열도와 한반도 남부 고대사 창작 (1)

1. 일본(열도백제)을 야마토왜로 날조 열도에서도 왜(예)계는 피지배민에 불과하였다왜는 강어귀로 간 우리 민족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강역에 살았던 이들은 백제와 고구려인이 되었고, 석탈해 세력은 신라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어업을 주로 한 왜(예)인들이 열도로 먼저 이주하여 열도의 지역명이 왜로 되었다. 전술하였듯이 왜계 세력이 열도를 지배한 적은 없다. 백제 멸망 후, 신라와 당에 점령 당하지 않은 열도의 백제인들이, 국호를 백제의 별칭이었던 일본으로 하면서, 일본국이 등장하였고, 이들이 신라와 대진의 간섭기가 끝난 후 독립하여 우리의 역사에서 이탈하였다. 8세기까지 한국말을 하였고 한국옷을 입었던 열도의 고대사는 우리의 고대사이다.  「일본서기」에서 야마토왜는 일본의 지방명이나 속국이다일제유사사학은 일..

역사 2025.04.05

한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6) - 고구려 연호의 변동

13. 고구려 연호의 변동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북경부터 요양까지 고구려 유물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모택동 등 공산당 지도부도 요하 동쪽부터는 조선이라 생각했으나, 그러한 생각과 달리 본고의 주장처럼 북경부터 고구려 영토인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래서 중국은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역사 날조를 시작했다. 북경부터 요양까지의 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분묘를 서진이나 삼연(전연, 후연, 북연)의 묘로 날조했다. 서진과 삼연은 영정하 이남에 있었으므로 영정하 이북의 고구려 영토에 이들의 분묘가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은 조양의 분묘는 도굴범이 벽화를 불태웠다고 사기 친다. 벽화가 고구려 벽화와 완전히 같거나 벽화에 있는 글자가 고구려의 것임을 증명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벽화를 태웠을 것이다..

역사 2025.03.25

한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5) - 고구려 왕통의 변동

11. 고구려 왕통의 변동 (1) 해씨에서 고씨로의 변동 서진 태강 연간에 쓰여진 『삼국지』는 “고구려의 왕이 본래는 연노부(涓奴部)에서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桂婁部)에서 나온다”고 하며, 『후한서』 「동이열전」도 “왕이 본래는 소노부(消奴部)에서 나왔으나 점점 미약해져서 뒤에는 계루부에서 나온다”고 한다. 『삼국사』는 “부여가 항복하니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연나부가 왕의 부였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따라서 『후한서』의 소노부보다는 『삼국지』의 연노부가 타당하다고 보인다. 이에 대해 강단유사사학은 송양(松讓)의 ‘양(讓)’이 ‘노(奴)’ 혹은 ‘나(那)’와 통한다고 여겨, 이를 특정 왕의 이름이 아니라 소노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주몽이 송양과 다퉈 승리하는 일화..

역사 2025.03.24

한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4) - 왕건은 천주(泉州)의 실력자였던 왕봉규

(3) 고려와 백제유민 왕건의 집안은 백제유민왕건의 증조부는 753년 패강(浿江)의 서쪽 나루터에 와서, 배 안에서 돈을 꺼내어 뿌리고 상륙하였다. 그는 왕건의 증조모에게 자신이 당나라의 귀인이라 말하고 떠나갔다. 당귀인이 당나라에서 왔으며 배에 돈을 싣고 다녔다는 것은 그가 중국 동해안에 근거지를 둔 백제유민 무역상임을 의미한다.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감』과 『편년강목』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왕건의 증조부를 당 숙종이나 선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왕건의 조부가 唐父를 만나러 상선(商船)에 의탁하여 바다로 갔으며, 왕건 집안의 근거지가 예성강변의 개성이었고, 왕건은 903년 수군으로 나주를 점령하였고, 909년에는 견훤이 오월국으로 보내는 배를 사로잡았고, 909년 진도를 점령하였고, 912년..

역사 2025.02.19

한 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3) - 백제 수도의 변동

(10) 백제 수도의 변동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이유전술한 바와 같이 소서노의 위례성(미추홀)이 BCE 18년 건국 시 도읍지이고, BCE 5년 온조의 찬탈 시 온조의 위례성(서도 한성)이 두번째 수도이다. 두 위례성은 모두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에 있었다. 그 후 문주왕이 韓의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근초고왕이 동도 한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를 제외하고는 서도 한성이 백제의 수도였다.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것은 서울이 근초고왕 시기에만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문주왕이 천도한 웅진은 황하 동쪽문주왕이 475년 천도한 웅진은 韓의 웅진이다. 문주왕은 천도 이듬해인 476년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대두산성은 온조왕이 마한을 CE 8년 멸망시킨 직후인 CE 9..

역사 2025.02.17

한 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2) -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중국 영토 탈취설

(5) 4세기 전반 고구려의 중국 영토 탈취설 중제·일제·강단유사사학이 사기 쳐야만 하는 이유강단유사사학은 4세기 전반기에, 평양에 있던 낙랑군과 황해도에 있던 대방군을 고구려가 차지하였고,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반도에서 요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를 낙랑군과 대방군의 교치라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한국인이라면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라 할 것이다. ‘낙랑군 교치’라는 말은 중국 역사학자가 하는 말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의 사기질을 숨기기 위해 ‘낙랑군 교치’라는 어려운 중국말을 한다. 소위 낙랑군 교치설은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한, 더욱 치졸한 거짓말이다. 조선총독부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대동강 남쪽과 황해도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경우 뒤의 역사와 이어지지 않기 ..

역사 2025.02.15

한 상고사 주요 개정내용 (1)- 고구려 연호의 변동

13. 고구려 연호의 변동  중국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북경부터 요양까지 고구려 유물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모택동 등 공산당 지도부도 요하 동쪽부터는 조선이라 생각했으나, 그러한 생각과 달리 본고의 주장처럼 북경부터 고구려 영토인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래서 중국은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역사 날조를 시작했다. 북경부터 요양까지의 지역에서 발견된 고구려 분묘를 서진이나 삼연(전연, 후연, 북연)의 묘로 날조했다. 서진과 삼연은 영정하 이남에 있었으므로 영정하 이북의 고구려 영토에 이들의 분묘가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들은 조양의 분묘는 도굴범이 벽화를 불태웠다고 사기 친다. 벽화가 고구려 벽화와 완전히 같거나 벽화에 있는 글자가 고구려의 것임을 증명하였을 것이기 때문에 벽화를 태웠을 것이..

역사 2025.02.14

전한길은 극우인가?

전한길은 자신이 극우가 아니라고 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9/0005436926‘계엄은 계몽령’ 전한길, “내가 왜 극우” 발끈…“함부로 왜곡 말라”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을 계몽령이라고 표현하며 부정선거 의혹에 동조하고 나선 ‘한국사 일타 강사’ 전한길씨가 ‘극우’라는 표현에 발끈했다. 전씨는 2일 오전 네이버 ‘전한길 한국사 카페’에 “아까 ‘극우?’라고n.news.naver.com전씨는 2일 오전 네이버 ‘전한길 한국사 카페’에 “아까 ‘극우?’라고 댓글 다신 분이 있던데...역사도 왜곡하면 안 되듯 사람에 대한 평가도 함부로 왜곡하면 안 된다”며 “‘극우’라고 말하는 분들 스스로 돌아보라. ‘극우..

역사 2025.02.02

전한길의 한국사와 그의 사실 인식

전한길은 한국사 사기집단의 소설을 광고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소위 한국사 강사이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일제 조선총독부의 역사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잘나가는 한국사 강사들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역사를 공부해도 그들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돈이 되는 것인지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에서만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역사라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들이므로 전광훈에 쉽게 농락 당할 것이다. ​우리 역사를 찾지 않는 한 전광훈 전한길과 같은 이상한 사람들은 언제라도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역사 2025.01.25

『한서』 「지리지」 가 말하는 계(薊)의 위치

『한서』 「지리지」 燕地, 薊,南通齊、趙,勃、碣之間一都會也。[師古曰:「薊縣,燕之所都也。勃,勃海也。碣,碣石也。」]​계(薊)는 남쪽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와 통하며, 발해와 갈석산 사이의 한 도회지이다. [안사고는 “계현(薊縣)은 연나라가 도읍한 곳이다. 勃은 발해이다. 碣은 갈석산이다”라고 말한다]​​『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연나라의 수도였던 계(薊)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인데, 난하 갈석산과 바다 사이에는 도회지가 있을 공간이 없다. 일제 중제유사사학과 난하설을 비롯한 재야유사사학은 계(薊)를 북경이나 천진으로 보는데, 북경이나 천진은 절대로 『한서』 「지리지」가 말하는 계(薊)가 될 수 없다​동일한 내용이 『사기』 「화식열전」 에도 나온다.​『사기』 「화식열전」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 대체로 연 역시 발..

역사 2024.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