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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사이비의 서북한 기년명 벽돌 연대 추정의 사기성

역사회복 2024. 9. 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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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은 위 화일에만 나옵니다.

 

 

 

강단사이비의 서북한 기년명 벽돌 연대 추정의 사기성

 

 

1.

 

강단유사사학과 강단유사고고학은(이하 강단사이비라 한다) 평안도와 황해도를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으로 보아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의 주체를 중국인이나 중국계 이주민이라 주장하며 벽돌에 사용된 연호를 중국 왕조의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엔 일제·중제유사사학의 소설을 향한 무한한 충성심 외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

 

 

2. 강단사이비의 연대 추정

 

광화5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182(후한 靈帝 光和 5)

흥평2년명 전, 평안도 대동군, 195(후한 獻帝 興平 2)

정시9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48(조위 齊王 正始 9)

가평2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50(조위 齊王 嘉平 2)

감로명 전, 황해도 신천군, 256~259(조위 高貴鄕公 甘露 연간)

경원원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60(조위 元帝 景元 원년)

경원3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62(조위 元帝 景元 3)

태시4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68(晉 武帝 泰始 4)

태시7년명 전(2), 황해도 봉산군, 271(晉 武帝 泰始 7)

태시10년명 전(2), 황해도 봉산군과 평안도 평원군, 274(晉 武帝 泰始 10)

태시11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75(晉 武帝 泰始 11)

함녕원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 275(晉 武帝 咸寧 원년)

함녕5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279(晉 武帝 咸寧 5)

태강원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과 봉산군, 280(晉 武帝 太康 원년)

태강3년명 전, 황해도 봉산군, 282(晉 武帝 太康 3)

태강4년명 전(5), 황해도 신천군 봉산군 등, 283(晉 武帝 太康 4)

태강7년명 전(2), 황해도 신천군, 286(晉 武帝 太康 7)

태강9년명 전, 황해도 안악군, 288(晉 武帝 太康 9)

원강원년명 전, 황해도, 291(晉 惠帝 元康 원년)

원강3년명 전, 황해도, 293(晉 惠帝 元康 3)

원강5년명 전, 황해도 안악군, 295(晉 惠帝 元康 5)

태안2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3(晉 惠帝 太安 2)

영흥3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6(晉 惠帝 永興 3)

영가명 전, 황해도 신천군, 307~312(회제 永嘉 연간)

영가7년명 전, 황해도 신원군, 313(회제 永嘉 7)

건흥4년명 전, 황해도, 316(민제 建興 4)

태녕5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23~325(동진 明帝 泰寧 연간)

함화10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35(동진 成帝 咸和 10)

건무9년명 전, 황해도, 343(후조 石虎 建武 9)

건원3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45(동진 康帝 建元 3)

장무이명 전, 황해도 봉산군, 348(동진 穆帝 永和 4)

건무16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50(후조 石虎 建武 16)

영화8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352(동진 穆帝 永和 8)

영화9년명 전, 평양시, 353(동진 穆帝 永和 9)

건시원년명 전, 황해도 신천군, 407(후연 모용수 建始 원년)

 

 

3. 강단사이비 연대 추정의 사기성

 

1) 불가능한 중국 연호

평안도와 황해도가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이 아니었다는 것은 논외로 한다. 강단사이비가 계속 억지를 부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엔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중역수 남쪽 지역이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 없이도 그들 주장은 사기임이 명백히 드러난다.

晉 武帝의 태시는 10년까지 있다. 즉 태시는 11년이 있으므로 진 무제의 연호일 수가 없다. 동진 明帝泰寧4(326) 226일까지 있다. 즉 태녕은 5년이 있으므로 동진 명제의 연호일 수 없다. 동진 成帝咸和9년까지 있다. 즉 함화는 10년이 있으므로 동진 성제의 연호일 수 없다. 동진 康帝建元2년까지 있다. 즉 건원은 3년이 있으므로 동진 강제의 연호일 수 없다. 후조 石虎建武14년까지 있다. 즉 건무는 16년이 있으므로 후조 석호의 연호일 수 없다. 동진 穆帝永和12년까지 있다. 그런데 동수묘에 영화 13년이 나오므로 영화는 동진 목제의 연호일 수 없다.

그리고 태시 11, 태녕 5, 영화 13년은 중국의 어떤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해의 간지가 을미로서 함화 10년은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건무 16년은 후한 유수를 제외하고는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해의 간지에 가 있는 해로서 건원 3년은 중국 어느 왕조에도 없는 연호이다.

또한 원강5년명 벽돌엔 元康五年八月十八日乙酉造라 쓰여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295818일은 丙子일이어서 원강이 晉 惠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晉 惠帝 이외에는 전한의 유순이 BCE 65년부터 5년간 원강을 사용하였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 벽돌의 원강은 중국의 연호일 수 없다. 함녕5년명 벽돌엔 咸寧五年三月六日己丑造라 쓰여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27936일은 己巳일이어서 함녕이 晉 武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진 무제의 함녕 5년 이외에 중국의 함녕 5년은 없다. 태강원년명 벽돌들엔 각각 太康元年三月六日太康元年三月八日王氏造라 쓰여 있는데, 태강 원년은 개원 시기가 429일이므로 태강이 晉 武帝의 연호가 아님이 입증된다. 진 무제 이외에는 요나라에서 태강이 사용되었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 벽돌의 원강은 중국의 연호일 수 없다. 따라서 원강, 함녕, 태강도 고구려의 연호임이 입증된다.

무려 9개의 연호가 결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음이 입증되는데 강단사이비는 이들 연호가 중국의 연호라고 우긴다. 고구려가 연호를 사용하였음이 입증되고, 발견된 연호 20개 중 결코 중국의 연호가 될 수 없는 것이 9개나 되며, 각 왕조는 같은 연호를 사용한 경우가 많으므로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견된 연호는 고구려의 연호로 보는 것이 정상적임에도, 강단사이비는 동북공정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중국 왕조의 연호라고 억지를 쓴다.

 

2) 억지의 지존

그들의 주된 억지는 연호 변경을 모르고 구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흥평 2, 가평 2, 경원 원년, 경원 3, 함녕 원년, 태강 원년, 태강 3, 원강 원년, 원강 3, 태안 2, 건원 3, 영흥 3, 건시 원년 등의 연호는 어떻게 연호 변경을 알고 바뀐 연호를 사용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필자가 원년 이외에 2년과 3년을 포함하는 이유는 동수묘의 영화 13년을 그들이 연호변경을 모르고 영화 13년이라 썼다고 억지 쓰기 때문이다. 동수는 영화 13년에 전사하였는데, 당시의 3년상 관습상 영화 15년에 무덤을 닫는다. 즉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영화 15년은 승평 3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벽돌로 대규모의 무덤을 만들 정도의 지배층이라면 연호나 날자의 착오를 용인하지 않는다. 연호 변경을 알 수 없었다면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표현하기 위해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면서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지키고 있다. 억지의 백미는 태강 원년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3년이 지나도 연호 변경을 모른다고 했다가, 태강은 연호가 바뀌지도 않았는데 태강이라는 연호를 썼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눈물겹고 애절한 충성심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김미경과 안정준은 건시원년명 벽돌의 건시를 혜제 시 司馬倫이 찬탈하여 19일부터 49일까지 사용한 연호로 보아 301년이라 주장한다. 연호 변경을 모르고 기존 연호를 사용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하다가, 갑자기 3개월 반란자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그들의 자기모순은 그 탁월성이 유사사학계의 으뜸이라 아니할 수 없다.

 

3) 강단사이비의 소설에서 평안도와 황해도가 고구려의 영토가 된 후

그들은 평안도와 황해도가 고구려의 영토가 된 후인 313년 이후의 벽돌이라 주장하면서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고구려의 왕은 허수아비라고 주장한다. 벽돌을 만드는 것이 비밀스럽게 이루어질 수 없다. 고구려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면 그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4) 연호의 추종 왕조 설정과 그 수시 변동

연호의 추종 왕조도 소설이다. 그들은 313년 이후 진과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343년에는 후조의 연호를 쓰다가, 345년에는 다시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350년에는 다시 후조의 연호를 쓰다가, 352년에는 다시 동진의 연호를 쓰다가, 407년에는 다시 후연의 연호를 쓴다고 한다. 동진은 북조를 통제하기 위한 외교적 고려의 대상이 될 뿐이지 고구려가 복종하는 체 할 대상은 될 수 없으므로 고구려가 동진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개연성이 거의 없다. 왜 후조의 연호를 썼는가에 대해 여호규는 한편 340년대에 後趙의 연호가 많이 나오는데, 이를 후조 방면의 망명객이나 후조와 교섭하던 재지세력과 연관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라고 하면서 주석이나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주장에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나타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의, 강단사이비의 거짓말에 의하면 중국계 망명인들의, 연호 추종이 수시 변동인 이유는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호규는 건시 원년을 ‘407(동진)’이라 표시한다. 후조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도 겨우 거짓말 하면서 넘어갔는데, 건시 원년(후연의 연호에 의해서 407) 관련하여 후연의 연호를 사용한 이유를 또 조작하는 것은 모양이 안 난다고 그는 생각한 것 같다. 그가 학자로수의 기본적 윤리성을 지키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김미경과 안정준은 건시원년명 벽돌의 건시를 혜제 시 司馬倫이 찬탈하여 19일부터 49일까지 사용한 연호로 보아 301년이라 주장하는데, 이는 추종 연호의 수시 변동을 조금이라도 완하하여 후연이라도 추종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발상으로 생각된다. 거짓말과 자기모순을 활용하는 그들의 살신성인은 공맹의 뺨도 여지없이 칠 수준이다.

 

 

4.

 

강단사이비의 억지와 자기모순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 자신도 그들이 주장하는 벽돌의 연대추정은 전혀 개연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강단이 유사사학인 이유는 객관적 사료를 무시하고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숭이보다는 아이큐가 높을 것이므로, 동북공정과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충성을 상정하지 않고는 그들의 행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위 연호들은 모두 고구려의 연호로 보고 연대를 추정해야 한다.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출토된 벽돌의 연호가 중국 왕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평안도와 황해도가 낙랑군과 대방군이 아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참고문헌

김미경, 高句麗 前期對外關係 硏究,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안정준, 高句麗樂浪·帶方郡 故地 지배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여호규, 4세기 高句麗樂浪帶方 경영과 中國系 亡命人의 정체성 인식, 한국고대사연구 53, 2009. 159-200

장병진. 서북한 지역 전축분(塼築墳) 연대의 하한 재검토 기년명전(紀年銘塼)을 중심으로, 박물관과 연구 1, 2024. 96-119.

정인성, 대방태수 장무이묘의 재검토, 한국상고사학보 제69, 2010. 39-69.

조성훈, 한상고사, 북랩,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