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일본서기 사료비판과 관련한 임동민의 주장(24.9.2.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반론

역사회복 2024. 9. 5. 10:53

  1. 임나는 가야인가?

임동민은 일본서기는 "고대 한일 사이 다양한 사건 기록돼 있으나 일왕 중심 과장ㆍ왜곡

'이중 굴절ㆍ연대 불분명' 한계 주의해 연구에 활용하면 중요 자료"라고 말하면서 "경남 일대에 있던 가야 여러 나라의 역사가 <일본서기>에 많이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즉 임동민은 강단사이비답게 일본서기의 임나=가야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임나는 가야가 될 수 없다. 강단사이비들은 임나=가야의 증거를 '무슨 이유에선가'라고 주장한다. 강단사이비들은 가야가 562년에 망했다고 하면서도, 일본서기에서 7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등장하는 임나를 가야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해 해명이 있어야 하는데, 조선총독부가 교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묵언수행하며 총독부의 교시를 기다리고 있다.

임동민은 가야의 여러 나라라고 하는데, 가야는 한 나라이다. 삼국사 삼국유사는 모두 가야왕을 왕이라 하고 지방수령은 주(主)라고 한다. 여러 마을국가는 열도의 임나에 타당한 말이다.

일본서기는 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고 하는데 가야의 북쪽에는 바다가 없다. 강단사이비 중 한 사이비는 낙동강이 바다라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한다. 그가 소설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 일본서기의 사료비판과 관련하여

임동민은 강단사이비들이 어마어마한 역사학자로서 사료비판을 엄밀히 수행하여 연구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기꾼의 자질이 없으면 강단사이비로서 교수가 될 수 없음을 명확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위대하신 강단사이비들은 임나의 위치를 음상사로 한반도 남부에 비정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유일한 실증은 지명의 음상사이다. 그들은 신라7국, 임나10국, 임나4현 등 「일본서기」에 나오는 거의 모든 지역을 한반도의 지명과 유사하다고 하여 한반도에 비정한다. 이들은 임나의 지명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역이 열도에 수십 개씩 발견되며, 한반도의 지명은 정확하게 임나의 지명과 일치하지 않음에도, 쉬운 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택하여 고도의 음상사 기법으로 음상사 아닌 것을 음상사화 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음상사에 꽂힌 서번트 증후군 환자가 있다면 강단유사사학과 비슷한 행태를 보일 것이다. 재야유사사학은 지명이 동일한 경우만을 대상으로 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동일하지 않은 것을 고도의 음상사 기법으로 동일화시킨다는 점에서 재야유사사학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유사성을 실현한다. 그들은 진정한 천재 유사역사학자들이다.

일본서기를 사료비판하여 역사적 사실을 발견한 가장 대표적 학자는 최재석이다. 그는 일본서기의 과장 왜곡을 없애고, 일본서기가 전하는 역사적 진실을 발견하였다. 그가 발견한 역사적 진실은 열도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사실이다. 백제는 열도에서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고 관료를 임기제로 파견하여 열도를 경영하였다.

강단사이비들은 일본서기를 사료비판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추종하고 있을 뿐이다. 총독부 교시가 없는 곳에서는 묵언수행만 하는 생명체들이 사료비판이라는 말을 꺼낸다. 그가 비판이라는 말의 뜻이나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쪽빠리 깡패의 자의적 음상사에 의한 임나 위치비정을 위대한 학술적 성과로 추종하면서 조선총독부에 충성맹세하는 사이비들이 비판이라는 학술 용어를 떠벌리니 가소로움을 떠나 씁쓸할 뿐이다.

임동민은 다른 강단사이비들처럼 엉뚱한 소리를 한다. 그는 "일부 유사역사학을 믿는 진영에서는 남의 나라에서 만든 <일본서기>를 '무조건' 믿지 말자거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무조건' 일본 내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주장을 펼친다."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무식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공격의 상대방을 그의 공격을 위해 창조하며 그 자신이 대단한 학자인 것처럼 사기를 친다.

일본서기를 사료비판하고 활용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히자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반대할 수도 없는 원칙적인 말이다. 일본서기에서 임나와 가야는 다르다고 나와 있음에도 조선총독부 교시를 좇아 임나=가야라고 하는 강단사이비들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강단사이비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임나4현이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와 4현은) 아침저녁으로 내왕하기 쉽고 닭과 개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강단사이비들은 임나4현을 전라도 전체, 전라남도 전체, 혹은 전남 동부 전체라고 주장한다. 물론 임나4현의 크기는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도에 비례한다. 왜왕을 과장하는 일본서기가 아침저녁으로 내왕하고 닭과 개가 어느 마을의 것인지도 모를 작은 지역이라 규정했는데, 강단사이비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축지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하였다는 도술역사학 지식을 발견하고, 당시의 닭과 개의 활동범위는 반경 백킬로미터 정도에 달했다는 고생물학 지식을 발견하여 임나4현을 광대한 전라도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위대한 강단사이비들의 도술역사학과 고생물학의 업적과 그들의 탁월하고 엄밀한 일본서기 사료비판에 대해 존경심이 들지 않을 수 없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3. 임나일본부설의 극복과 관련하여

임동민은 "현재 한국과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폐기하였다."고 주장한다. 일제와 강단 사이비들은 임나일본부의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을 안라국으로 축소하고, 그 성격을 외교기관으로 보므로 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과 강단사이비 둘 모두 야마토왜가 열도를 장악한 고대국가라고 간주하여 열도를 우리 상고사의 강역에서 제외한다. 야마토왜는 실체가 없는 정치체다. 둘 모두 「일본서기」의 일본이 백제의 담로나 백제 관료인 왜왕임을 숨기기 위해 일본을 야마토왜로 날조하고 있다. 둘 모두 낙랑군을 보정시에서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 중국 동부와 북부의 우리 역사강역을 제외하고 있다. 둘 모두 BCE 24세기의 고조선을 부인하고, 『삼국사』의 사료가치를 불신하면서 한반도 남부는 소국들이 우글거리는 원삼국 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가 성립되며, 가야는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의 여러 소국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여러 마을국가의 명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 소국의 명칭이라고 날조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이 임나일본부의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을 안라국으로 축소하고, 그 성격을 외교기관으로 보므로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하나, 그들도 백제 신라 가야가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야마토왜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며, 일본 즉 열도백제가 열도의 마을국가를 통제하는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한반도 남부의 이야기로 보므로, 일제의 야마토임나설과의 차이는 극히 사소하다.

방법론적으로도 둘 모두 「일본서기」의 임나는 557년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가 될 수 없음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가야라고 우기며, 「일본서기」 249년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 우기며, 「일본서기」 임나는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문언을 무시하는 등 일제가 교시한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일본서기」를 철저히 무시한다. 둘 모두 유일한 근거는 음상사인데, 이마저도 가짜 음상사이며, 열도에 있는 진짜 음상사 지명은 모두 무시한다. 둘 모두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마을국가에나 적합한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철면피를 쓰고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에 적용시키는 코미디로 일관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한국사의 고대사 연표를 작성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의 청출어람은 「일본서기」 무시에서 두드러진다. 그들은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날조하면서, 전쟁과 정벌을 동맹과 통교라 하고, 「일본서기」 464년 2월 이야기와 관련하여선 구원군을 침략군이라 하고, 문언에 없는 고령의 야마토왜 군사기지를 창조하는 등 언어의 연금술사적 능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낙동강이 바다이므로 가야가 임나라는 놀라운 역사지리학의 업적을 선보이며, 임나4현과 관련하여선 놀라운 고생물학과 고인류학의 성과를 내놓기도 한다.

일제유사사학의 핵심적 날조인 야마토왜 실재설과 「일본서기」의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라는 억지에 동의하면서, 임나일본부의 성격이나 범위에 관해 말장난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과의 대단한 차별점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며 대중을 속이고 일제유사사학의 날조를 퍼뜨리는 것은 그들이 일제유사사학의 주구임에 불과하다는 명확한 증거일 뿐이다.

4. 분국설과 관련하여

임동민은 분국설이 "역사학적, 고고학적 근거가 희박하여, 한일 역사학계에서 폐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한일 학계는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추종하는 일제사이비와 강단사이비일 뿐이다. 역사학적 근거 부족은 강단 사이비에 적용되는 말이다. 임나=가야의 문헌 근거가 전혀 없고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고 일본서기에 명백히 기술되어 있어도, 가야=임나라는 총독부 교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분국설에 문헌 부족을 언급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분국설의 문헌근거는 일본서기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관료인 왜왕이 고구려마을 신라마을 임나마을 백제마을을 조정하고 다스리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물론 분국설이 백제 관료인 왜왕의 열도 통치를 파악하지 못한 부분에서는 오류이나, 3세기 말 백제가 진출하기 전까지는 가야의 분국이 주도하는 분국설이 타당하다.

지금 일본의 천황가는 성이 없다.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임을 숨기기 위함이다. 닌토쿠(仁德)묘 오진(應神)묘 다카마쓰(高松)묘 후지노키(藤木)묘에서 의도치 않게 그 부장품이 드러났는데 모두 고대 한국인의 것으로 드러나자, 일본 정부는 100여년 전부터 왜왕묘의 후보묘까지 과학적 조사와 발굴을 금지하고 있다. 현재도 계속 고분을 발굴하고 있으나 공개하지 않고 있다.[최재석의 연구에서 인용] 이는 고대 초기에는 가야 이주민이 지배하다가 3세기 말부터 백제가 지배하였고, 5세기에는 광개토대왕이 고구려계 국가를 나라에 세워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지배하였고, 6세기 이후에는 백제가 고구려계를 물리치고 열도 전체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결국 역사학적적 근거 부족과 고고학적 근거가 희박하여 폐기되어야 하는 견해는 강단사이비의 임나=가야설이다.

5. 과거의 제국주의 학설에 충성하는 강단사이비들

임동민은 "<일본서기>의 '독'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관점에서 짜릿한 유혹이었다."고 말한다. 임동민에게 조선총독부 교시를 추종하는 것은 짜릿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유혹에 넘어가서 교수가 되었다.

그는 "지금은 반칙 없이 역사학 방법론에 근거하여 학문적으로 연구할 시점이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가 이제 교수가 되었으니, 조선총독부 교시를 그만 추종하고 학문적으로 우리 역사를 연구하길 바란다. 물론 강단사이비 무리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겠지만, 그가 진정한 역사 연구의 길로 들어선다면, 역사는 강단사이비 출신이지만 강단사이비를 척결하고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운 위대한 인물로 그를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