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유사역사학이 가야사 연구 방해한다는 조법종의 주장(24.8.12.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반론

역사회복 2024. 9. 4. 15:18

1. 조법종의 토론 수준

 

조법종은 그의 글 처음부터 끝까지 인신공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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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사>와 <전라도천년사> 등 지역사 서술 내용 중 <일본서기>를 활용해 가야 및 마한의 국명과 지명 위치를 한반도 지역에 비정(비교하여 정함)한 것에 대해 이른바 '유사 역사학적 관점'을 가진 일부 주장에 의해 간행이 지연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놀랍게도 고대사가 아닌 근대사 연구자인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의 일방적 주장을 따른 것이다.

이덕일 소장은 자신이 일본 식민사관을 추종한 모습은 숨기고 고대 한일관계를 연구한 학자들이 식민사학 극복을 위해 이룩한 연구들을 오히려 식민사학으로 매도하는 적반하장식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장의 엄청난 문제점을 모르는 일부 시민단체와 정치인들이 이 소장의 자기 모순적 주장을 추종하며 한국 고대사학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덕일 소장의 어설픈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과거 '국사' 교육과 '한국적 민족주의'를 강조한 시대에 교육받아 민족의식과 반일의식이 강한 분들이다. 또한, 이들 세대는 1970∼199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경험하며 '식민과 독재, 분단 콤플렉스'를 민족주의라는 토대 구축을 통해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순수한 민족의식이 강한 세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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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은 사이비들이 이덕일의 주장을 따른 것이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이덕일이 고대사 연구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한다. 역사 연구가 무슨 벼슬인지는 모르겠으나, 강단유사사학은 항상 연구자의 자격을 언급한다. 필자가 보기엔 조법종은 필자의 아이큐 삼분의 일 정도로 추측되며, 이덕일과 비교하면 이덕일 아이큐의 이분의 일 정도인 것 같다. 조법종을 비롯한 강단사이비들은, 자신들은 조선총독부를 승계한 강단유사사학 선배들로부터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므로, 그러한 학위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에 토달지 말란 말을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한다. 조법종은 여기서 고대사 연구자가 아닌 이덕일이 고대사에 언급을 한 것이 놀랍다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인신공격이나 하는 것이다. 필자는 조법종을 비롯한 강단사이비들의 글에 반론할 때 그들의 아이큐와 필자의 아이큐를 비교하는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들이 먼저 인신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런 유치한 말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실증을 통해 올바른 역사를 찾는 것이 문제이며, 그들의 아이큐에는, 자신들의 아이큐에 자괴감이 있는 강단사이비 이외에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강단사이비들을 공격하는 시민단체와 정치인들이 모두 이덕일의 주장을 따른다는 것도 전혀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필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덕일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있다. 조법종은 유신시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적 사고는 하지 못하고 민족의식만 투철해서 이덕일의 주장에 맹종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더라도 그들 주장의 근거가 확실하다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법종은 강단사이비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인신공격만 하고 있다. 겁 많은 똥개가 시끄럽게 짖는 것처럼 조법종은 자신의 주장에 근거가 없으니 반대하는 사람들 인신공격만 하는 것이다.

2. 일본서기의 활용과 관련하여

조법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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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서기>는 일본 역사기록이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된 관련 지명. 정치체 명칭은 모두 일본열도에 존재해야만 한다. 둘째, '임나'라는 명칭은 일본열도에만 존재하였다. 셋째, 따라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 등을 한반도에서 찾으면 과거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한 식민사학자의 견해를 수용한 식민사학 추종자다. 넷째, 한국 학자 중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하고 관련 지명을 한반도에 비정한 자들도 모두 식민사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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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일본서기를 사료로서 비판적으로 활용하여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말하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결국 조법종의 이 말은 거짓말을 통한 인신공격에 불과하다.

강단사이비들은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라고 한다. 근거를 대라고 하니, 김태식은 무슨 이유에선가 가야를 임나라고 불렀다고 한다. 무슨 이유에선가가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이다. 이것이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한 연구인가?

그들은 562년에 가야가 망했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서기」에는 562년 이후에도 신라와 전쟁을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임나가 7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등장한다. 그들이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라 주장한다면, 가야가 망한 후에도 「일본서기」에 왜 임나가 나오는지를 설명하여야 한다. 그들은 묵언수행한다. 조선총독부 선생님들이 교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의 소설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실증하기 위해 총독부 교시의 결함에 대해선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실증주의는 조선총독부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 추종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이 백제에 군수물자와 인력을 꾸준히 징발 당하고, 일본에 백제의 관료들이 임기제로 파견되는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한다. 강단사이비들은 백제와 일본이 선진문물과 군사지원을 주고받았다고 사기친다. 일제와 강단은 백제가 중국 남조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는 남조 왕조에게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하였는가? 백제는 남조에게 형식상 사대하였지만 군수물자와 병력을 바친 적은 없다. 선진문물과 군사력의 대가관계는 국가 사이에는 있을 수가 없다. 지방의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고 지방에 지배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내는 것은 중앙정부이다. 이 지방과 중앙의 관계가 일본서기에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열도는 백제의 영토였고 야마토왜라는 독립된 정치체는 열도에 존재한 적이 없다. [최재석의 연구를 보면 더 자세한 증거들이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활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밝힌 학자는 최재석이다. 최재석은 일본서기의 과장을 제거하고 대화왜는 백제의 영토에 불과함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강단사이비들은 최재석의 주장에 대해선 한마디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반론을 하지 못하면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강단사이비 내에서 왕따가 되고 교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묵언수행만 하고 있다.

조법종이 위와 같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강단사이비들 내에서 자신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3. 분국설과 관련하여

조법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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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주장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1960년대 북한 학계 김석형이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하고자 제기한 '삼한삼국 일본열도 분국설'(1963)과 이를 발전시킨 <초기 조일관계연구>(1966), 조희승의 <초기조일관계사>(1988) 등의 북한 학설을 그대로 추종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견해는 이후 60여 년 동안 한국과 일본 학계의 연구 결과 문헌 근거 부족과 고고학적 자료 부재로 '실체가 없는 상상적 견해'로 이해되고 있다.

심지어 필자가 2008년 개성에서 조희승 소장을 만났을 때 한국과 일본의 최신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지견이 부족함을 직접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덕일 소장 등은 이같이 60년 전 철 지난 북한 학계 초기 견해만을 맹종하며 그사이 이룩한 대한민국 고대사, 고고학계 성과는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고 반일 감정을 자극하며 시대착오적 '식민사학팔이 주장'으로 순수한 국민을 오도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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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이 인신공격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나타난다. 그는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인신공격만 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한국과 일본 학계는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추종하는 일제사이비와 강단사이비일 뿐이다. 문헌 근거 부족은 강단 사이비에 적용되는 말이다. 임나=가야의 문헌 근거가 전혀 없고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고 일본서기에 명백히 기술되어 있어도, 가야=임나라는 총독부 교시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분국설에 문헌 부족을 언급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분국설의 문헌근거는 일본서기이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관료인 왜왕이 고구려마을 신라마을 임나마을 백제마을을 조정하고 다스리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물론 분국설이 백제 관료인 왜왕의 열도 통치를 파악하지 못한 부분에서는 오류이나, 3세기 말 백제가 진출하기 전까지는 가야의 분국이 주도하는 분국설이 타당하다.

지금 일본의 천황가는 성이 없다.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임을 숨기기 위함이다. 닌토쿠(仁德)묘 오진(應神)묘 다카마쓰(高松)묘 후지노키(藤木)묘에서 의도치 않게 그 부장품이 드러났는데 모두 고대 한국인의 것으로 드러나자, 일본 정부는 100여년 전부터 왜왕묘의 후보묘까지 과학적 조사와 발굴을 금지하고 있다. 현재도 계속 고분을 발굴하고 있으나 공개하지 않고 있다.[최재석의 연구에서 인용] 이는 고대 초기에는 가야 이주민이 지배하다가 3세기 말부터 백제가 지배하였고, 5세기에는 광개토대왕이 고구려계 국가를 나라에 세워 고구려와 백제가 나누어 지배하였고, 6세기 이후에는 백제가 고구려계를 물리치고 열도 전체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결국 문헌 근거 부족과 고고학적 자료 부재로 '실체가 없는 상상적 견해'는 강단사이비의 임나=가야설이다.

4. 전라도 왜와 관련하여

조법종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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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경악한 것은 이덕일 소장은 북한 학계 학설만 따른 것이 아니라 일본 극우 황국사관론자들의 견해를 적극 반영해 고대 한반도에 '왜'가 존재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한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즉, 이 소장이 1999년에 쓴 <우리역사의 수수께끼>에서 다음과 같은 과거 일본 식민사학자, 현재의 극우 황국사관론자들과 똑같은 주장을 하였다.

"왜(倭)는 적어도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 왜는 400년과 404년 고구려와의 대규모 전쟁에서 패하여 쇠퇴하더니 급기야 한반도 남부를 포기하고 일본 규수 지방으로 건너가 동정(東征)을 감행하면서 강성해졌다…. 강성해진 왜는 과거에 한반도에서 차지했던 위상을 근거로 한반도 남부의 연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전남 나주 반남고분군은 고대 한반도 남부지역을 지배했던 그 왜라는 정치세력이 남긴 민족사적 유산이다." ('한국고대사의 최대 미스터리: 잃어버린 왕국, 나주 반남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27쪽)

이 같은 주장은 일본이 패전 후 1960-1970년대 '임나일본부설'을 고고학적으로 변형한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 및 한반도 진출설'과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가 제기한 '왜이동설'(중국 남부→한반도 남부→일본 구주)을 추종한 입장이다. 즉, 이 논리는 일본 극우 황국사관론자들이 주장한 2차대전 시기 '대동아공영권 구축' 인식을 고대 시기로 확장한 논리로서, 마치 왜를 동북아 해역을 장악했던 바이킹처럼 보는 일본 극우 인식을 그대로 추종한 것이다. 결국, 이덕일 소장은 1997년 자신이 근대사 박사논문을 쓴 2년 뒤에 갑자기 일본 극우파들의 고대 대동아공영권적 논리인 '고대 왜이동설'을 그대로 베껴 '전라도는 왜의 땅'이라고 주장한 식민사학자인 것이다. 그리고 '임나일본부'란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에 존재했던 '왜한(倭韓)의 고토회복운동의 전초기지'라고 주장하는 일본 식민사관 추종의 핵심 존재임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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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법종이 이덕일의 약점을 발견했다고 크게 고무되어 떠벌리는 부분이다. 필자는 이덕일, 에가미, 이노우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백제의 주민인 전라도 왜 (영산강 왜)가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덕일 등의 오류는 전라도 왜가 백제의 주민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영산강 어귀의 왜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전한 후 육지에서 신라를 침공하는 왜이다. 이들은 209년 가야와 싸웠던 포상팔국이기도 하다. 포상(浦上)은 강어귀의 마을이란 뜻이므로 포상팔국은 영산강 어귀의 왜를 의미한다. 영산강의 왜는 399년 이후 한반도에서 상당수가 사라진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에게 반격하기 위해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이에 지친 영산강 왜인들은 신라를 공격하라는 백제의 명령에 반항하여 집단적으로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광개토대왕릉 비문 399년조에, 내물왕이 왜인을 백성으로 삼아서 광개토대왕에게 보고했다고 기술되어 있고, 『삼국사』에도 399년 거듭된 전투로 징집이 증가하여 백성들이 신라로 달아나 호구가 줄어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신라전」에도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도 120현민이 신라로부터 403년부터 405년 사이에 열도로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399년 신라로 항복한 왜인들이 결국에는 열도로 보내진 사실을 말하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중의 하나이다. 그 이후로 전라도에서 신라 내륙을 공격하는 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전라도 왜는 전라도 지역의 전방후원분과 대형 옹관묘에 의해서 입증된다. 강단사이비들은 대형옹관묘가 마한의 유물이라고 사기치고 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가 CE9년에 망한 마한을 계속 살려 두라고 한 교시를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 5세기 6세기에도 백제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였다고 사기를 치고 있다.

한반도에 왜가 있었다고 발끈하는 조법종의 모습이 사이비의 전형인 것 같다. 삼국사 광개토대왕릉비 북사 일본서기 등 한중일의 다양한 문헌과 금석문으로 입증되고 고고학 유물로 입증되는 전라도 왜를 무섭다고 부정하는 조법종이야말로 사이비민족의식으로 가득찬 진정한 사이비학자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5. 결론

조법종의 글에 우리 역사의 연구에 도움이 되는 말은 한 글자도 없다. 조법종의 주장은 한마디로 인신공격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