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의 태녕(泰寧, 太寧) 연호

역사회복 2024. 8. 23. 14:28

 

태녕(泰寧, 太寧) [소수림왕, 374-384]

 

태녕이라는 연호는 집안의 태녕(太寧)4년명 기와 두점과 황해도 복우리 2호분의 태녕(泰寧)5년명 벽돌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기와 한점의 명문이 “太寧四年太歲□□閏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로 확인되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집안은 343년 처음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된다. [강단유사사학은 집안 평지성이 국내성으로 유리왕이 정한 수도이고, 집안 산성이 환도성이라 하는데, 집안 산성의 기와는 5세기의 것이라 하고, 집안 평지성의 축성연대가 320년 이후라 하여 그들의 주장에 전혀 근거가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태녕명과 같은 권운문 기와가 집안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데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집안이 343년 수도가 되고, 집안에서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권운문 기와가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윤달의 6일이 기사일이 되는 점을 고려하면 태녕 4년은 377년이다. 즉 태녕은 소수림왕이 374년부터 사용한 연호라 보아야 타당하다.

 

중제·강단유사사학은 태녕이 동진의 연호라 하면서 태녕 4년을 325년이나 326년이라고 사기를 친다. 먼저 고구려가 동진의 연호를 사용했을 개연성은 거의 없다. 고구려가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면 북조의 연호를 사용했어야 한다. 동진은 북조를 통제하기 위한 외교적 고려의 대상이 될 뿐이지 복종하는 체 할 대상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는 더 가관이다. 동진의 태녕 연호는 323년 3월부터 326년 1월까지 사용되었다. 윤달이 있는 해로서 6일이 기사일이 되는 시기는 325년 윤8월이다. 즉 동진의 태녕 연호는 태녕 3년에만 윤달이 있다. 그러자 그들은 우기기를 시전한다. 태녕 3년을 고구려 기술자들이 무식하고 부주의해서 태녕 4년으로 썼다고 우긴다. 일의 간지까지 따져서 표기하였는데 해를 잘못 쓴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저 조선총독부와 동북공정에 대한 올곧은 충성심을 표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뇌를 개돼지의 뇌라고 인정한다. 그들의 고귀한 희생에 존경심이 복받친다. 다른 사기꾼들은 326년이라 우긴다. 이들은 윤달과 6일이 기사일이라는 정보는 그냥 무시한다. 이들은 우기기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조선총독부와 동북공정에 대한 충성방법에는 다양성이 있음을 과시한다.

 

이들 사기꾼들은 태녕 5년명 벽돌에 대해선 고구려가 촌이라 고구려인들이 동진의 연호 변경 사실을 모르고 327년까지 태녕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조선총독부와 동북공정에 대한 올곧은 충성심으로 무장한 이들은 태녕 5년명 벽돌이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사기를 친다. 평양과 황해도의 낙랑군과 대방군이 313년 망했다고 사기를 치면서도 327년에도 낙랑군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동진에서, 318년부터 321년까지 대흥이 사용되었고, 322년부터 323년까지는 영창이라는 연호가 사용되었는데, 고구려가 어떻게 동진의 연호가 영창에서 태녕으로 바뀐 줄 알고 325년에는 태녕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이들 사기꾼들은 동진의 영화 연호는 12년까지 있는데, 고구려는 영화 다음 연호인 승평 3년까지 영화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사기를 친다. [동수는 영화 13년 10월 사망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3년상 관습 상 영화 15년에 무덤을 닫는다. 즉 영화가 동진의 연호라면, 무덤을 닫을 때인 영화 15년까지 고구려가 승평으로의 변경 사실을 몰라야 동수가 영화 13년에 죽었다고 쓸 수 있다. 실제 영화는 고구려 장수왕이 469년부터 사용한 연호이다]

 

고구려가 영락, 건흥, 연가, 연수, 영강 등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음이 입증됨에도, 이들은 동진이 태녕이나 영화를 사용하였다고, 고구려가 사용한 태녕과 영화를 동진의 연호라고 사기 친다. 이들의 행태는 조선총독부와 동북공정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전제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하기 어렵다. 이 사기꾼들이 교수라고 이들의 말을 믿는 개돼지들이 많다면 역사광복은 요원하다. 교수 말이라고 무조건 믿어주는 개돼지들이 역사광복의 가장 큰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