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경인명도가 증명하는 백제의 열도 지배

역사회복 2024. 9. 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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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

 

연민수는 구주에서 출토된 경인명도가,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전사할 당시 지원군으로 파병된 야마토왜 정권의 북구주 호족인 축자화군(筑紫火君)에게 위덕왕이 보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민수의 글은 논문으로서의 기본적 형식도 갖추지 않고 있으며, 그의 주장은 근거가 매우 희박하다. 연민수는 야마토왜 정권의 실재를 인정하고 있으나 이 칼은 열도가 백제의 영토였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의 하나로 드러난다.

 

2. 연민수의 글은 논문 형식을 갖추었는가?

 

띄어쓰기는 연민수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띄어쓰기법에 의해 작성한 것 같아서 언급하지 않겠다. 그만의 독창적 띄어쓰기법을 활용한다면 독자를 위해 그가 행하는 방법의 개요라도 설명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모든 각주 표시가 마침표 왼쪽에 표시되어 있다. 이것도 연민수만의 독특한 각주 표기법인지 모르겠다.

연민수의 논문 제목은 “九州의 元岡 G-6호분 庚寅銘大刀와 백제”이다. 그런데 그는 2011년 9월 7일 구주(九州) 복강시(福岡市) 원강고분군(元岡古墳群) C-6호분에서 명문이 새겨진 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C-6호분은 그의 논문에서 3번 등장한다. G-6호분은 28번 등장한다. 따라서 연민수의 의도는 G-6호분으로 판단된다. 제목에 나오는 중요 단어를, 한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오기를 한다는 것은 이 논문이 얼마나 성의 없이 쓰여진 논문인가를 나타낸다.

연민수는 「일본서기」를 인용하면서 ‘---”의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로 써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연민수는 16쪽에서는 ‘않고’를 ‘많고’라 표기하고 있다. 연민수는 19쪽에서는 ‘일본의’를 ‘일본에’로 표기하고 있다. 연민수는 23쪽에선 ‘별동대로’를 ‘별동대호’로 표기하고 있다. 연민수는 26쪽에선 ‘벌어지기’를 ‘벌이지기’로 표기하고 있다. 연민수는 6쪽에선 앞 쪽 작은따옴표만 있는 황당한 문장을 제시하고, 24쪽에선 앞 쪽 큰따옴표만 있는 문장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은 사소한 실수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오류들은 연민수의 글이 내용을 떠나 형식만 따져도 논문으로서의 자격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23쪽에서 혜왕자 귀국 시 왜가 병기와 양마를 주었다는 「일본서기」 556년 1월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각주는 「일본서기」 555년 2월의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 또 그는 24쪽에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당시 백제의 피해 상황을 백제왕을 비롯한 좌평 4인, 사졸 29,600인을 베어 죽이고 말은 한필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고 하면서 각주를 “53) 『三國史記』新羅本紀 眞興王 16年 正月條.”라 적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내용은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7월의 기사이다. 각주도 제대로 달지 못한다면 논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연민수는 태세명을 새긴 금석문 7例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① “太寧四年太歲□□閏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吉林省 集安縣城)

② “□四時興詣□□□□萬歲太歲在丁巳五月廿日”(吉林省 集安縣城)

③ “丁巳□□□□歲□□□□□□萬世太歲在丁巳五月廿四日”(吉林省集安縣 禹山墓區 M3319 方檀階梯積石墓)

④ “咸和十年太歲乙未孫氏造”(樂浪・帶方郡)

⑤ “建元三年太歲在巳八月孫氏造”(樂浪・帶方郡)

⑥ “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 番昌仕宦日遷位至矦王”(德興里古墳 墨書銘)

⑦ “(蓋內)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 太王敎造合杅用

“(外底)延壽元年太歲在辛, 三月□太王敎造合杅三斤”(瑞鳳塚出土銀盒杅)

 

④와 ⑤의 벽돌이 낙랑·대방군의 것이라는 증거는 없지만, 연민수의 견해를 인정하더라도 금석문의 출처에 일관된 기준이 없다. ④와 ⑤의 벽돌에 대해서 낙랑·대방군이라 하였다면 ①, ②, ③에 대해선 고구려 황성이라 하여야 일관성이 있다. ‘길림성 집안현’이 어떤 기준으로 출처로 표시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가 ①, ②, ③에 대해 ‘길림성 집안현’으로 표시하였다면 ④와 ⑤에 대해선 황해도 신천군으로 표시했어야 한다. 그가 연구자로서의 기본적 자질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연민수는 「일본서기」가 각 천황의 즉위 연도를 太歲 기년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고 하면서, 이는 12년을 주기로 공전하는 목성(歲星)의 기운을 받아 즉위했다는 상서로운 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연민수의 사고 체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말은 「일본서기」는 각 천황의 즉위 연도를 “이 해가 太歲○○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인데, 해의 간지 앞에 太歲를 붙이면 그 해가 상서로운 해가 된다는 근거가 연민수의 뇌를 제외하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또 연민수는 「일본서기」 계체의 사망 기사에 태세 기년이 표시되고 있는데, 이는 “주변 제국의 정치적 변고에 太歲 기년의 표기는 도참사상에서 말하는 길흉을 예언한다는 점에서 죽음, 장의와 관련된 사례라고 생각된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계체의 사망 기사에 태세 기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단지 『백제본기』를 인용하면서 『백제본기』의 기사에 태세 기년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설사 계체의 사망 기사에 태세 기년이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태세 기년이 죽음과 장의에 관련되었다는 연민수의 주장은 연민수 혼자만 이해 가능할 것이다. 연민수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서기」 다른 천황들은 태세 기년이 사용되지 않고 사망했기 때문에 죽음과 장의와 관련되지 않고 죽었다는 놀라운 결론이 도출된다. 연민수에 의하면, 태세 기년이 연민수 마음에 따라, 때로는 상서로운 해를 표시하고, 때로는 죽음이나 장의를 표현하는 것이 된다.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내용을 주장하는 것은 논문이 될 수 없다.

 

3. 연민수 글의 내용상 문제점

 

1) 명문의 판독과 해석

연민수는 경인명도 명문을 “大歲庚寅正月六日庚寅日時作刀凡十二果練”으로 판독한다. 연민수는 전반부의 ‘大歲庚寅正月六日庚寅日時作’는 ‘庚寅年 正月六日 庚寅의 日時에 刀를 만들었다’로 해석하면 큰 문제는 없다고 한다. ‘凡十二果練’에 대해, 연민수는 凡은 언급하지 않고, 果練은 ‘담금질을 다하여 완성하다’로 해석하며, 十二는 완결성을 의미하는 말이라 하면서, ‘凡十二果練’의 구체적인 해석을 제시하지는 않고, 단지 “이 대도는 우주질서의 법칙에 따라 완벽하게 만들어낸 최고의 名劍이라는 역법사상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결론 짓는다. 12가 동양에서 완결성을 의미하는 수라는 것은 연민수로부터 처음 듣는 말이다. 설사 12를 완결성을 의미하는 수라 인정하더라도, 그 경우엔 12는 練을 수식해야 하므로 12와 練 사이 果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연민수의 해석에 의하면 凡은 내용상 어울리지 않는 글자가 된다. 연민수처럼 해석하려면 凡을 ‘무릇’으로 보아야 하는데, ‘무릇’과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말이 어울릴 수 없다. 그래서 연민수는 凡에 대해선 침묵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의적 주장을 해석이라고 주장하는 연민수의 용기가 가상하다.

 

2) 경인명도의 三寅劍성과 관련한 칠지도 언급

연민수는 경인명도가 삼인검이라 하면서, 칠지도도 火의 기운이 가장 강한 길일을 택해 만들어졌으며 칠지도의 ‘五月十六日丙午正陽’도 길상구라고 한다. 칼과 거울에 새기는 길상구는 ‘五月丙午’ 또는 ‘五月丙午日中’이다. 그런데 칠지도의 명문은 1981년 일본 NHK가 X-Ray로 판독한 결과, 5월이 아니라 11월로 판명이 났다. 또한 正陽이 길상구로 쓰인 적은 없다. 正陽은 현재까지 발견된 칼이나 거울의 명문에 사용된 경우가 없고 칠지도에 유일하게 보이는데, 그 사전적 의미는 정오이지만, 『사기』 「사마상여열전」에 나오는 정양에 대해 『사기색은』은 남면수조(南面受朝)하는 천자의 권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칠지도의 ‘五月十六日丙午正陽’이 길상구라는 연민수의 주장은 명문 자체의 판독에도 오류가 있고, 正陽이 길상구로 쓰인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연민수의 자의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3) 경인명도의 전래 배경

연민수는 위덕왕이 전쟁이 종료한 지 3년이 지난 567년 즉위하였다고 한다. 『삼국사』에 의하면 위덕왕은 554년 즉위하였다. 연민수에 의하면 554년부터 567년까지 백제에 왕이 없었다는 말인데,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황당한 주장을 하는 연민수의 사고체계가 놀라울 뿐이다. 연민수에 의하면 553년부터 564년까지 백제와 신라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하였다는 말인데, 이 말도 사료에 없는 연민수의 소설이다. 연민수는 557년을 567년으로 착각한 것도 아니다. 연민수는 567년 언급 바로 전에 “부여 능산리유적 목탑터에서 발견된 百濟昌王石造舍利龕에는 백제 창왕 13년에 창왕의 同母妹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민수는 554년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축자국조와 570년에 만든 경인명도의 연관성을 주장하기 위해 소설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경인명대도는 이러한 백제의 위기적 상황이 수습된 후에 만들어졌다. 이 대도는 바로 구원병을 통솔해 백제를 도와 신라와 싸웠던 구주의 호족 축자화군에게 보낸 것이다.”라고 한다. 소설가 연민수의 앞날에 무궁한 영광을 기원한다.

연민수는 「일본서기」 555년 2월의 이야기를 근거로 위덕왕이 혜왕자를 왜국에 보내 병력을 요청했다고 한다. 연민수는 「일본서기」 554년 12월 이야기를 근거로, 혜왕자의 요청으로 파견된 왜군의 축자국조(筑紫國造)가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연민수는 단순한 소설가에 만족하지 않고 SF 소설가가 되려는 것 같다. 555년 2월 이후(「일본서기」에 의하면 556년 1월) 파견된 축자국조는 시간을 거슬러 554년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다. 왜국의 구원병과 경인명도를 연관 시키기 위해 연민수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있다. 결국 연민수의 주장엔 근거가 없기 때문에 연민수는 SF 소설이라도 지어내야 하는 것이리라.

 

4) 열도에 야마토왜 정권이 있었는가?

연민수는 열도에 야마토왜국이 있었고, 백제는 왜국에 군사력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민수가 제시하는 증거는 국가간 관계를 입증하기 보다는 백제의 열도 지배를 입증하고 있다.

연민수는 백제가 파견한 제박사는 왜왕권에 기술 연수의 형식으로 파견되었고 일정 기간 후 후임자와 교대하였다고 주장한다. 기술 연수라면 교대 제도는 불필요하다. 기술 연수라면 기술의 전수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 사람이 전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일정 임기가 있었다면 더더욱 기술 연수로 보기 어렵다. 기술의 전수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 걸릴지 사전에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제박사가 열도에 파견되었고, 일정 기간 후에는 후임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면, 제박사를 열도의 백제 관료로 봄이 자연스럽다.

연민수는 야마토왜가 혜왕자 귀국 시 군사지원을 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서기」 556년 1월 이야기를 제시하고 있다. 「일본서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년 봄 정월에 백제의 왕자 혜가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병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하게 상으로 물품을 많이 하사하여 여러 사람들이 찬탄하였다. 이때 아배신(阿倍臣)·좌백련(佐伯連)·파마직(播磨直)을 파견하여 축자국의 수군(水軍)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도록 하였다. 별도로 축자화군(筑紫火君)[『백제본기』에는 축자군의 아들 화중군(火中君)의 아우라고 한다.]을 파견하여 용감한 군사 1천 명을 이끌고 미저(彌弖)[彌弖는 나루터의 이름이다.]까지 호위하도록 하고 뱃길의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연민수는 위 「일본서기」 이야기를 근거로 “왜국에서 보낸 군수물자는 축자국의 수군과 별동대로 축자화군이 통솔하는 1천명의 병력이다. 여기에 병기와 군마 등을 포함하면 왜왕권이 백제에 보낸 파병 규모와 비용은 상당량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서기」 원문에 의하면 축자국의 수군은 혜왕자가 백제에 도착할 때까지의 호위병이지, 전쟁터로 파병된 군대가 아니다. 축자화군의 별동대 1천명도 미저라는 나루터까지의 호위병에 불과하다. 병기와 군마만 백제로 보냈다.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외국의 사절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까지 철통같이 호위해 주는 나라는 없다. 위 이야기는 열도가 백제의 지방임을 증면한다. 혜왕자는 신라와의 전쟁을 위해 열도로부터의 수탈을 독려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이다. 열도의 백제 관료들은 혜왕자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여 병기와 군마를 징발하여 백제에 보냈고, 혜왕자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백제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료 파악이다. 연민수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해석을 방해하기 위해 원문의 호위병을 파견한 군대로 날조하고 있다.

연민수는 백제가 관산성 전투 직전인 553년 1월에도 야마토왜에 군병을 청하였고, 야마토왜는 553년 6월에 군사지원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연민수가 근거로 제시한 「일본서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6월에 내신(內臣)[이름이 빠졌다.]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양마 2필, 동선(同船) 2척, 활 50장(張), 화살 50구(具)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칙을 내려 “요청한 군대는 왕이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따로 칙을 내려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易博士), 역박사(曆博士)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라. 지금 위에 열거한 직종의 사람들은 바야흐로 교대할 시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한 복서(卜書), 역본(曆本)과 여러 가지 약물(藥物)도 함께 보내라.”고 명하였다.

 

「일본서기」의 과장을 제거하고 위 이야기의 핵심을 보면, 백제 중앙정부가 열도에서 각종 병기와 군대를 징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파병하면서 파병된 군대의 작전권을 상대방에게 준다면 그것은 파병이 아니라 징발된 것이다. 야마토왜가 실재했고, 야마토왜의 군대가 파병되었다면, 파병군 사령관의 이름이 명시되어야 하고, 지휘권을 포기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제박사가 교대되는 것은 백제의 관료이기 때문이다. 백제의 전문 관료들은 백제의 수도나 그 부근에서 근무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변방인 열도에 근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무기간을 채우면 복귀하도록 했을 것이다. 백제의 수도와 열도 간 이동되는 것을 보면 열도에서 수도로는 각종 물자와 인력이 이동되었고, 수도에서 열도로는 전문 관료와 서적 약품 불교사상 등이 이동되었다. 이러한 조세 징수와 병력 징발, 관료 파견은 「일본서기」에 여러 번 기술되고 있다. 이는 백제와 열도의 관계가 국가간 관계가 아니라 중앙과 지방의 관계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연민수는 “백제의 도검은 왜국의 지배층들이 선호했던 권력의 표상이었다.”고 얼떨결에 진실을 말한다. 백제의 왕이 하사한 도검이 열도에서 권력의 표상이 되는 것은, 도검을 통해 백제 왕이 도검 수증자를 백제의 관료로서 인정한다는 백제 왕의 신임이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5) 선진문물과 군사지원의 대가관계?

열도는 백제의 영토였다. 그래서 관료가 교대로 파견되었다. 야마토왜라는 정치적 실체가 없다. 열도에선 백제가 망한 후에 최초로 고대국가가 성립한다. 일제와 강단은 열도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해 선진문물과 군사력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연민수도 계속하여 백제가 선진문물을 주고 야마토왜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강단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ㅇ 백제는 왜에 학술·기술 등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대신 왜는 백제의 요청에 응해 군사를 원조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백제가 왜에≪千字文≫과≪論語≫를 보내주고 五經박사 등을 파견한 것과<광개토왕비문>이나 白江전투에서 보듯이 왜가 원군을 파견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ㅇ 5세기에 왜왕은 국내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해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입하면서, 한편으로 백제의 권유에 따라 송 중심의 책봉체제에도 편입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개로왕 7년(461)에는 왕의 동생 곤지를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동맹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ㅇ 남조와의 통교가 중단되고 난 후 왜국에서는 6세기 초 繼體(케이타이)천황이 즉위하여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계체천황은 선진 문화·물산 등을 수용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백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백제 武寧王은 재위 13년(513)부터 대가야지역에 대한 진출을 꾀하면서 왜국을 백제측에 끌어들이기 위해 계체조정에 오경박사를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전하였다. --- 백제는 聖王대에 더욱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성왕 16년(538)에는 왜국에 佛像과 經論을 보내고 22년에는 금관가야의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워 왜국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려 하였다. 왜국은 군대와 군사물자를 백제에 제공하는 대가로 선진문물의 전수를 백제측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왕 32년 백제는 五經博士·易博士·曆博士·醫博士·採藥師 등을 왜국에 파견하였고 왜국은 병사 1,000명과 말 100필, 배 40척을 백제에 보냈다.

ㅇ 한강유역 탈환전이 성공한 후 552년의 시기에 가야연맹은 그 패권이 대가야국과 안라국의 둘로 나뉘어 있는 채로 백제에게 종속적으로 연합되어 대외관계면에서 백제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었다. 또한 백제는 왜에 불상·경론 등의 문물 전수를 하면서 군병을 요청하였고, 왜는 선진문물이 궁하여 백제의 요청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ㅇ 신공기 46년조에는 야마토왜의 사자인 사마숙례가 366년 왜 탁순에 왔는지 그 이유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탁순에 온 야마토왜의 사자가 결과적으로 탁순의 중개로 백제에 갔다. 이것은 야마토왜의 사자가 탁순에 온 목적 중의 하나가 탁순을 경유해서 백제로 가는 데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마토왜의 사자가 백제에 간 목적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재위 21년(366) 백제를 방문한 사마숙례의 종자인 이파이에게 준 품목 중에 철정 40개가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수요가 증대하고 있던 철 등의 선진문물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강단은 야마토왜가 무기의 원료인 철정이 없어서 백제에 군사력을 제공하였고, 말 선박 군량미 등 군수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면서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한다. 철정도 못 만드는데 군사강국이라는 것도 우스운 말이고, 선진문물을 위해 국가가 국민을 용병으로 만들어 타국의 전쟁에 보낸다는 것은 범인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강단이 만들어낸 희대의 코미디이다. 용병은 먹을 것을 위해 존재할 수는 있어도 선진문물을 위해 존재할 수는 없다.

열도를 백제 영토로 보면, 백제가 열도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탈하는 것은 당연한 국가행위가 된다. 백제의 박사 파견이나 불교 전수도 지방 경영을 위한 것이 되어 국가의 자연스런 행정 운영이 된다. 제 박사와 공인들이 순번제로 교대했다는 것은 그들이 백제의 관료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일제와 강단은 야마토왜라는 실체를 상정하기 위해, 백제가 열도 지방에 전문 관료를 파견하고 불교를 전수하는 것을 야마토왜의 선진문물 수용이라 날조해야 하고, 백제가 열도 지방으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탈하는 것을 야마토왜의 군사력 제공이라 날조해야 한다.

일제와 강단은 백제가 중국 남조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는 남조 왕조에게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하였는가? 백제는 남조에게 형식상 사대하였지만 군수물자와 병력을 바친 적은 없다. 선진문물과 군사력의 대가관계는 국가 사이에는 있을 수가 없다. 지방의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고 지방에 지배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내는 것은 중앙정부이다.

 

4. 결론: 경인명도는 위덕왕의 백제 관료에 대한 하사품

 

1) 명문 해독

필자는 ‘十二果’는 윤회를 일으키는 ①무명(無明), ②행(行), ③식(識), ④명색(名色), ⑤육처(六處), ⑥촉(觸), ⑦수(受), ⑧애(愛), ⑨취(取), ⑩유(有), ⑪생(生), ⑫노사(老死)의 十二因緣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즉 ‘十二因緣’이나 ‘十二因果’를 ‘十二果’로 표기하였다. 마지막 글자를 練이 아닌 鍊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필자는 鍊으로 보고, 그 의미는 ‘없애다’로 본다. 마지막 글자를 練으로 보아도 그 뜻을 ‘녹이다’로 보면 같은 의미를 가진다. 즉 경인명도의 명문은 “大歲庚寅正月六日庚寅日時作刀凡十二果鍊”이고, 그 의미는 “경인년 1월 6일 경인일에 맞추어 만든 이 칼은 모든 12 인과를 없앤다”이다. 원래의 한자 문법에 따른다면 동사인 鍊이 刀 다음에 와야 하나 백제에서 만들 때 우리말 어순으로 표기하였다고 보인다. 기존의 해석은 모두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거나 명문과 부합할 수 없어서 해독이라 할 수도 없다. 그리고 필자의 해석은 위덕왕이 연민수의 주장처럼 불교에 심취한 왕이었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2) 경인명도는 백제 왕의 백제 관료에 대한 하사품

408년 백제의 관료들인 후와 왕들에게 하사된 칠지도처럼, 570년 만들어진 경인명도도 당시 백제의 고위 관료들에게 하사된 칼이다. 경인명도가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전사할 당시 지원군으로 파병된 야마토왜 정권의 북구주 호족인 축자화군(筑紫火君)에게 위덕왕이 보낸 것이라는 연민수의 주장은 위에서 본 것처럼 SF 소설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554년 전투에서의 筑紫國造의 활약이 사실이라면, 축자국조가 진급하여 570년 당시에 백제의 고위 관료로서 경인명도를 받았을 수 있고, 축자국조나 그 후손이 구주에 정착하여 이 칼이 구주에 묻혔을 수는 있다.

경인명도의 명문은 부하에 대한 하사품임을 증명한다. 외교적 고려 하에 주는 칼에 증여자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고 외교적인 수사가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경인명도는 부하에 대한 하사품이기 때문에 위덕왕의 불교사상을 표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삼국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박남수, 「백제 전지왕 ‘奉元四年’銘 칠지도와 그 사상적 배경」, 『東硏(동연) 10』, 2021. 1-57쪽.

연민수. 「九州의 元岡G-6호분 庚寅銘大刀와 백제」, 『한일관계사연구, 61』, 2018. 3-34쪽,

연민수, 『고대한일교류사』, 혜안, 2003.

조경철, 「백제 칠지도의 제작 연대 재론 -병오정양을 중심으로-」, 『백제문화 제42집』, 2010. 5-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