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진경대사를 왜인 후손이라 보는 건 '자의적 비문 곡해'라는 이근우의 주장(24.8.26.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반론

역사회복 2024. 9. 4. 22:20

1. 도명이 진경대사를 왜인이라 하였는가?

이근우는 도명이 진경대사를 왜인이라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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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은) 진경대사의 조상이 임나의 왕족인 초발성지라고 주장했다. 초발(草拔)은 '쿠사나기'라는 일본의 성이고 성지(聖枝)는 '쇼오에'라는 일본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풀을 벤다는 뜻인 '쿠사나기(草薙)'의 한자는 풀깎을 치(薙)를 쓴다. 우선 초발이라는 성은 일본 측 자료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성지라는 이름은 현재도 있지만, 키요에·사토에·마사에 등 모두 여성의 이름으로만 쓰인다. 결국 왜인이 건너와 신라의 새로운 김 씨가 됐다는 주장이므로, 진경대사도 왜인의 후손이라고 했으니 새로운 일선동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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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근우의 논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초발성지가 열도의 이름이라 한 것이 초발성지를 왜인으로 본 것인가? 이렇게 무식한 사람이 대학교수를 하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BCE 1000년 이후 한반도의 농경민들이 구주로 건너가 농경이 시작되고, 죠몬인이 야요이인으로 대체되었다. [Robbeets, M., Bouckaert, R., Conte, M. et al. “Triangulation supports agricultural spread of the Transeurasian languages.” Nature 599, 2021. p.620. ]

열도에 왜인만 살았다는 것은 이근우의 무식한 생각이다. 물론 왜인은 어업에 종사하여 열도에 가장 처음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열도의 지역명이 왜가 되었다. 왜왕 무는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의 칠국제군사를 자칭하였다. 왜왕은 백제의 열도를 지배하는 관료의 명칭이며, 무는 무령왕이다. 즉 무령왕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왜왕이라는 백제 고위 관료의 지위에 있었다. 여기의 7국은 열도의 마을국가들을 말한다. 무는 송에 보낸 표문에서 가는 길이 백제를 거친다고 하여 본국 백제와 7국제군사의 백제가 구별됨을 분명히 하였다. 기초적인 사료 공부도 하지 않고 조선총독부 교시 지키기에만 전념하는 이근우는 이런 사실을 알 턱이 없을 것이다.

도명도 이러한 이근우의 주장에 실소를 금치 못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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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제는 칼럼 서두에 필자가 "진경대사를 왜인의 후손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대사를 '임나 왕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지 '왜인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때의 임나는 김해의 금관가야가 아니라 가야인이 일본열도에 진출해 세운 가야의 분국으로 이후 왜에 흡수된 소국이라 말했다. [위기의 식민사학계 2024.9.1. 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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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는 도명의 주장에 적절한 반박을 못하겠으니 도명의 주장을 변형시켜, 도명이 주장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반론하고 있다. 이는 무식한 사람들이 항상 하는 일상적 행태이다.

2.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의 해석과 관련하여

이근우는 최연식의 새로운 소설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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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에 대해서는 동국대 최연식 교수가 2021년에 '수로(首露)'의 다른 표기일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초(草)는 풀만 아니라 처음 '初(초)'라는 뜻도 있다. 초고(草稿) 초창기(草創期)는 모두 처음이라는 뜻이다. 처음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 수(首)와 통한다. 수석(首席) 수상(首相)이 그런 뜻이다. 발(拔)은 '뽑다'가 기본 뜻이지만 '특출하다, 두드러지다'라는 뜻도 있다. 해발(海拔)은 바다에서 솟아나있다는 뜻이다. 출(出)은 로(露)와 통하고 노출(露出)이라는 어휘도 존재한다. 또한 풀을 뽑는다는 뜻이려면 벌초(伐草)처럼 발초(拔草)로 쓰는 게 한문의 어순으로 옳다.

최연식 교수는 금관가야 시조의 이름에 대해 초발(草拔)이 수로(首露)라는 표기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았다. 진경대사탑비가 <삼국사기>보다 200년이나 앞서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발성지는 왜인의 이름이 아니라, '임나의 왕족이자, 처음으로 나타난 자(首露·草拔)의 성스러운 후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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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는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을 '그의(진경대사의)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자 처음으로 나타난 자의 성스러운 후예'라고 해석한다.

강단사이비들의 코미디가 또 발동한다. 그들은 사기칠 때 오역을 통해서 사기를 친다. 강단유사사학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성스러운 후예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려면 초발만 써서 ‘그 선조는 임나왕족 초발’이라고 써야 한다. 주어가 진경대사의 선조이다. 술어는 선조의 이름을 말하면 된다. 진경대사의 선조가 초발이었다면 초발만 쓰면 된다. 진경대사의 선조가 초발의 성스러운 후예라는 말은 진경대사는 초발의 성스러운 후예가 아니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 비문은 경명왕이 진경대사를 존경하여 직접 작성한 문장이다. 진경대사는 성스러운 후예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필자가 만약 이근우 등 강단사이비들 관련 문장을 쓴다면 이들의 선조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강단사이비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의미를 표시하기 위해 이근우 등 강단사이비들의 선조는 초발(그들의 시조라 생각되는 사람의 이름)의 성스러운 후예라고 표현하겠다.

성지가 성스러운 후예의 의미로 쓰이려면, 성지 뒤에 사람 이름이 나와야 한다. 즉 진경대사의 가까운 선조를 표현하고 싶었다면 그의 선조는 초발의 신성한 후예인 누구라고 했어야 한다. 누구라는 말이 없다는 것은 초발성지가 사람이름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스러운 후예라는 말을 쓸려면 진경대사가 성스러운 후예라고 써야지 그 선조가 성스러운 후예라고 쓸 수가 없다. 선조에 성스럽다는 말을 쓴다면 그 선조는 성스러운 초발이라고 써야 한다. 어처구니 없는 사기 해석에 대응을 해야 하니 이런 말까지 써야 한다.

草拔聖枝는 사람의 이름이다. 초발성지는 열도식 즉 백제식 이름이다. 성지를 성스러운 후예라고 번역하는 것은 나는 지금 사기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3. 일본서기의 임나는 언제 멸망했는가?

이근우는 일본서기의 임나가 561년에 멸망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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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서도 임나가 561년에 모두 멸망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미 멸망한 임나 왕족이 김유신에게 항복할 필요가 있는가? 이미 멸망한 나라가 이웃 나라의 병사들에게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결국 도명이 <일본서기>의 임나를 일본열도의 임나로 보려고 하는 관점은 사료 해석의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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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이근우가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서기」에는 562년 이후에도 신라와 전쟁을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임나가 7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강단사이비들이 일본서기 이야기에 붙여놓은 제목에 임나가 나오는 경우로, 562년 이후의 것은 다음과 같다.

- 562년: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킴

- 562년: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킨 것에 대해 분개함

- 562년: 신라가 임나를 공격한 것에 대해 문책하고자 백제와 군사를 일으킴

- 571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임나를 멸망시킨 이유를 물음

- 575년: 신라, 임나, 백제에 사신을 보냄

- 583년: 임나를 다시 부흥하고자 기국조압승(紀國造押勝)을 보내 백제에 있는 일라(日羅)를 불러들임

- 584년: 난파길사목련자(難波吉士木蓮子)를 신라에 보내 임나에 다다름

- 591년: 임나를 세울 것을 명함

- 591년: 군대를 모아 축자에 머무르고, 신라와 임나에 사신을 보냄

- 600년: 신라와 임나가 서로 싸워 군대를 보내 신라를 침

- 601년: 고구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임나를 구하라 함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을 불러들임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이 축자에 도착함

- 610년: 신라와 임나의 사신이 왕경에 도착함

- 611년: 신라와 임나가 사신을 파견함

- 623년: 길사반금(吉士磐金)을 신라에 보내고 길사창하(吉士倉下)를 임나에 보내 상황을 알아봄

- 623년: 신라가 임나를 토벌하니, 천황이 신라의 토벌을 논의함

- 623년: 신라의 지세이(智洗爾)와 임나의 지(智)가 사신으로 옴

- 623년: 반금 등이 신라로 갈 때 신라와 임나의 영접선이 옴

- 638년: 백제, 신라, 임나가 사신을 보내옴

- 642년: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을 난파에서 향응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에 사신을 파견함

- 646년: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사신을 보냄

필자는 진경대사의 선조가 김유신에 투항하였다는 도명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는 진경대사의 선조가 신라에 귀부한 것으로 본다.

일본서기의 임나가 561년에 망했다는 이근우의 주장은 일본서기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료 해석의 일관성이 필요한 사람은 이근우일 것이다.

4. 임나의 위치와 일본어 관련

이근우는 사이비들이 임나의 위치를 특정하지 않았다고 불평을 하면서 대마도에 대마국이 있었고 3세기에 대마도와 열도는 일본어를 쓰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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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임나는 대마도나 일본열도에 있었을 거란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최소한 400년 동안 존재한 임나가 일본열도에 있었다고 한다면 최소한 어디에 있었는지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마도에는 3세기에 이미 대마국(對馬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고 이때 이미 일본어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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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 임나의 위치가 기술되어 있다.

BCE 33년: 任那者去筑紫國, 二千餘里. 北阻海以在鷄林之西南.

‘임나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가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일본서기」의 이 문언이 묘사한 임나는, 축자국을 구주 북쪽으로 보면 대마도는 이천리라 하기에 가까우므로 조희승이 논증한 오카야마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가야인의 이동에 따라 대마도, 오카야마 등 임나가 여러 개이므로 임나가 사용된 문맥에 따라 임나의 위치를 비정해야 한다. 「일본서기」는 가공의 일본국 중심지를 나라로 보고 이야기를 전개하므로 「일본서기」의 임나는 대부분 오카야마로 생각된다.

즉 대다수의 실증적 연구자들은 일본서기의 임나는 오까야마로 특정하고 있다. 대마도에도 가야인의 이동과정에서 임나가 있었다는 것이 일본서기의 임나가 오까야마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근우 등 강단사이비들은 조선총독부 교시에 충성맹세만 하고 있어서 임나의 위치를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대마도와 열도가 3세기에 이미 한국어와 구별된 일본어를 썼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위대한 언어학자 이근우가 위대한 발견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근우의 위대한 발견을 축하하며, 이근우가 위대한 발견에 부합하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 했으면 한다.

필자가 아는 한, 백제가 망하자, 신라의 부용국으로서 열도에서 최초의 고대국가가 성립되었고 8세기 말까지도 열도인은 한국문자와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옷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다. [최재석의 연구 인용]

8, 9세기까지 일본의 신라로의 사신단은 통역이 없었고, 당으로의 사신단은 백제유민을 통역으로 고용하였다. [김성호 연구 인용]

일제는 1940년 열도의 지명, 신사명, 사찰명, 성씨명, 동물명, 식물명, 가무와 음악명, 기물(器物)명 등이 모두 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조선의 국명에서 유래한 명사고-내선일체 회고자료』란 책을 발간했다. 열도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백제의 관료가 파견되는 백제의 영토였다. 백제는 열도에서 인력과 물자를 징발하였고, 열도에 관료를 파견하고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심었다. 백제의 열도 관료들은 통역관이 없었다.

5. 이근우의 멋내기

이근우가 글을 마무리하면서 도명을 제 깐에는 멋있게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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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업장은 또 어찌할 것인가?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일은 촘촘하게 얽힌 그물의 한 자락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한쪽을 끌어올리면 다른 쪽도 함께 끌려오기 마련이다. 승려라면 역사적 사실도 연기의 그물과 다르지 않다는 점부터 명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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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가 연기의 그물의 무서움을 안다면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역사연구를 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교시를 추종하면서, 조상의 이야기를 날조한 이근우 등 강단사이비들의 업보는 얼마나 클 것인가. 그들은 그들이 쌓은 업장의 무거움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그들이 가련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