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태화13년명 석조불상

역사회복 2024. 8. 24. 19:49

 

 

 

위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울산시 삼동면 직동리에서 출토되었다.

 

강단유사사학은 이 석불을 고구려의 것이라 주장한다. 근거는 말하지 않아 알 수 없는데, 아마 고구려가 위의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그런 것 같다.

 

--------------------

우리역사넷: 먼저 고구려 불상으로 대화13년명(大和十三年銘) 석불상은 공덕이 칠세 부모에게 미치고 중생이 모두 함께 악도를 떠날 것을 기원하며 조성하였다는 명이 있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print.do?levelId=km_011_0030_0050_0020&whereStr=)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고대금석문-고구려-불상명-대화 13년명 석불상 해제

대화 13년명 석불상은 일간지가 기록된 삼존석불상으로 동아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윗부분은 파손되어 대좌와 불상의 하부만 남아있으며 뒷부분에 명문이 쓰여 있다. 대화(大和)는 불상의 제작연대를 말한다. 이에 통일신라 시기로 보는 설과 고구려 장수왕 77년인 489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설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으나, 당(唐) 문종(文宗)이 827년부터 835년까지 사용한 연호 태화(太和)를 고려한 듯하다. 그러나 당의 태화는 9년에 그쳤으며, 13년까지 연장해서 보더라도 기사(己巳)년이 아니라 기미(己未)년이기 때문에 수긍하기 어렵다. 반면 489년설은 북위(北魏)의 태화 13년이 기사년일 뿐만 아니라 임인(壬寅)이란 월간지와 경신(庚申)이라는 일간지까지 일치한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크다. 따라서 이 불상의 제작연대는 고구려 장수왕 77년인 489년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불상의 제작 연대를 말한다. 불상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통일신라시대로 보는 견해(中吉功, 1971, 『新羅·高麗の佛像』, 二玄社, 425쪽; 李蘭暎, 1979, 『韓國金石文追補』, 亞細亞文化社, 53~54쪽)와, 489년(장수왕 77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 古代, 亞細亞文化社, 17쪽; 金煐泰, 1989, 「三國時代 佛敎金石文 考證」

------------------------------

 

 

이 불상에는

“大和十三年歲在己巳九月□□朔十九日庚申”의 명문이 있어

태화13년이 489년임을 알 수 있다. 원굉(효문제)이 477년부터 499년까지 태화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태화 13년이 489년이므로, 태화는 위의 연호이다. 위의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위나라에서 만든 불상으로 봄이 타당하다.

 

강단유사사학의 백승옥도 이 불상이 북위의 것이라 한다.

고대 울산의 역사 지리적 성격과 박제상 [한일관계연구 38집]

------------------

이 불상의 재질은 치밀한 砂岩으로 佛二菩薩의 獅子座에 博山香爐와 좌우대칭의 供養像列을 가지고 있는 북위 태화기의 전형적인 석불형식이라고 한다. 명문은 9자 15행으로 총 135자가 음각된 비교적 장문이다. 그리고 이 석불은 중국 운강석굴 제17굴의 窓東側의 太和 13년 龕과 그 명문의 내용이 일치하는 면이 많다고 한다. ------ 489년 북위에서 제작된 불상이 남부지방 깊숙한 곳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불가사의까지 한 것이다.

---------------------

 

 

다음은 이 석불의 모습인데 누가 보든지 고구려 양식이 아니다. 위나라의 것인데 강단유사사학의 눈에만 고구려의 것으로 보이는가 보다.

 

https://dms.donga.ac.kr/bbs/museum/1685/53194/artclView.do 의 사진 인용

 

 

백승옥이 이 불상을 위의 것으로 파악한 것은 바르지만, 강단유사사학자 답게 그는 이 불상이 만들어져서 고구려로 보내진 후에도 고구려군이 울산에 상주하였기 때문에 울산에서 이 불상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 강단유사사학자 이도학에게 동조한다.

-------------

이러한 유물과 유적의 잔존은 마치 수수께끼같은 것이긴 하지만,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과 관련시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도학은 이를 400년 고구려군 남정 이후 이(울주·동래) 근처에 고구려군이 상주한 결과로 본 바 있다. 인정할 수 있는 견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중원 고구려비의 于伐城을 于火縣으로 본다면 고구려가 군대를 울산에 보낸 구체적 예가 되는 것이다.

------------------

 

백승옥과 이도학에 의하면 최소한 불상이 위에서 만들어진 489년까지는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했다는 것인데, 이는 다음의 삼국사 기록과 모순된다.

눌지왕 38년(454)〕 8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39년(45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니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자비왕 6년(463)〕 가을 7월에 〔군대를〕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11년(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17년(474)〕 가을 7월에 고구려왕 거련(巨連)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왕 경(慶)이 아들 문주(文周)를 〔신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신라군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고구려에〕 함락되었고 경(慶) 또한 살해되었다.

 

 

강단유사사학은 도대체 논리란 것이 없다. 위나라의 것이 명백함에도 고구려 불상이라고 아무런 근거 없이 우긴다. 백승옥은 이 불상을 위나라의 것으로 보면서도 이 불상이 울산에서 발견된 이유에 대해 소설을 쓰다가 삼국사의 기술에 완전히 모순되는 주장을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조선총독부와 동북공정에 충성하기만 하면 되므로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생각한다면 부끄러워서 강단유사사학에서 빠져 나올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일제에 충성만 하는 생명체들이 강단을 독점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교수라고 무조건 믿는 개돼지 대중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