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장무이묘의 연대추정, 468년.

역사회복 2024. 9. 10. 15:19
  1. 올바른 연대 추정

장무이묘의 벽돌로부터 [大歲戊在漁陽張撫夷塼, 大歲在戊漁陽張撫夷塼] 무덤을 무신년에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太歲申漁陽張撫夷塼와 使郡帶方太守張撫夷塼으로부터 묘주가 고구려 유주의 어양에서 태어나 대방태수를 지냈던 고구려인 장씨임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대방태수와 撫夷를 허구의 자칭이라고 주장하나 무덤에 허구의 관직을 적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撫夷는 고구려 왕이 위로부터 받아 준 작호이다.

무신년은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한 이후의 무신년이다. 따라서 408년도 가능하나, 덕흥리고분의 태소래조도에 의하면 고구려는 초기 현지인을 태수로 임명하였으므로 408년으로 보기는 어렵다.

위는 488년과 490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이후 쇠락의 과정을 겪는다. 또한 523년에는 6진의 난이 일어나는 등 거의 망하는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528년에 무덤이 만들어졌다면 위로부터 받은 撫夷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568년이나 628년도 북제의 위상, 당과 고구려의 대치관계상 북제나 당으로부터 작호를 받았더라도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은 적다. [528년 이후는 전축분이 유행하는 기간도 아니다]

따라서 장무이묘의 무신년은 468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일제의 소설

288년에 만들어졌다. 대방군이 한반도에 있던 시절 중국인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이다. 이 무덤 주변에 대방군 군청이 있었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내용]

세키노 다다시는 평양 지역에서 일반적인 중앙 널길식의 이실이 딸린 궁륭형 벽돌무덤이라고 판단하였다. 이 복원안을 바탕으로 학계에서는 이를 낙랑군대방군이 존속하던 시기의 대방태수묘라고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이 장무이묘의 발견을 통해 이곳에서 남쪽으로 약 4㎞ 떨어진 봉산군 지탑리의 당토성(唐土城)이 대방군치지(帶方郡治址)였을 것이라는 유력한 증거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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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강단사이비의 소설

황해도의 대방군이 고구려의 영토가 된 후인 348년이다. 고구려식 무덤이다. 고구려가 황해도에 지배권을 완전히 행사하지 못했다. 장무이는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함께 망명하여 '대방태수'란 허호를 받은 중국계 인물이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내용]

그러나 요 몇 해 사이 발굴 당시의 상황이 재검토되면서 이 무덤의 널방 바닥에 비스듬히 놓여 있던 널돌을 천장석으로 이해하였다. 아울러 천장을 널돌로 덮은 구조의 벽돌무덤이 대부분 고구려무덤이라는 점과 석회가 발리는 점, 그리고 널길 부분에 이실이 달리는 무덤이 4세기 대 고구려무덤에서 일반적인 구조인 점을 들어 장무이묘를 대방군 멸망 후의 고구려무덤이라고 판단하였다.

널방 천장에 석개를 하는 사례는 연대가 353년으로 알려진 동리묘가 있으며 승리동3호, 노암리고인돌 등이 있다. 대체로 4세기 대의 고구려무덤이다.

장무이묘와 비교되는 인물로 안악3호분에 묻힌 동수(冬壽)가 주목된다. 동수는 고구려로 망명한 외래인으로 357년에 사망하였는데 그 묵서에서는 생전에 고구려로부터 관등과 관직을 수여받았다는 언급은 없다. 다만 중국의 관직만을 전하고 있다.

이를 볼 때,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계 인사가 옛 낙랑 · 대방 고지에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고구려 정부가 인접 지역 주민들의 통치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장무이 역시 동수의 사례처럼 낙랑 · 대방군의 멸망과 함께 망명하여 '대방태수'란 허호를 받은 중국계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즉, 대방군이 멸망한 314년 이후에 축조된 무덤이라면, 무신년(戊申年)의 연대는 348년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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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재야유사사학의 소설

장무이묘는 세키노가 날조한 무덤이다.

장무이묘 벽돌의 문제점: ①신원 표시가 많다 ②작명전통에 어긋나는 이름 -③문란한 호칭들 ④틀린 기년 표기 ⑤명문 전돌이 과도하게 많다

[중국 정사 기록을 통한 대방군 위치 고찰, 문성재(우리역사연구재단 책임연구원)]

5. 일제, 강단, 재야 유사사학의 공통점

ㅇ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벌을 인정하지 않는다. 광개토대왕릉비문 407년조를 부인한다. 덕흥리고분 벽화에서 유주자사 진이 13군 태수의 래조를 받는 태수래조도를 부인한다. 진의 후손들이 덕흥리고분 벽화를 그려 놓지 않았다면 우리 역사의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이 날아갈 뻔 했다. 물론 일제와 강단 사이비들은 벽화의 내용을 허구라 하거나 진이 고구려인이 아니라고 사기친다.

광개토대왕릉비문 407년 기사는 공격 대상이 지워졌지만 후연으로 추측할 수 있다. 407년 기사는 400년 기사 다음으로 많이 지워졌다. 영정하 남쪽 보정시 일대의 지명이 나타나기 때문에 일제유사사학은 이를 지우지 않을 수 없었다. 광개토대왕은 407년 후연을 정벌하고 위와의 완충지역을 남겨두기 위해 위성국인 북연을 건국시키고 돌아왔다. 위는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인정하는데, 요해는 요하 주변의 땅인 요하 북쪽의 유주와 남쪽의 평주를 의미하므로, 이는 위가 이 지역을 고구려의 영토로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후연 정벌의 명분이 기재되지 않고 간략히 전과만 언급된 것은 후연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정벌하더라도 왕실은 살려 놓는 것이 천자의 도리로 생각되고 있었는데, 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위성국 북연을 세워 스스로 천자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일제·중제유사사학과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처럼 백제를 정벌한 것이라면 백잔이 태왕의 은혜를 모르고 배반하여 토벌하였다라는 식의 명분이 삽입되었을 것이다. (한상고사에서 인용)

ㅇ 광개토대왕의 후연 정벌을 부인하니 백제 동성왕의 고구려 유주 점령도 인정하지 않는다. 백제는 481년 공격을 시작하여 483년 이전 고구려 유주를 점령하여 494년까지 유지하였다. 위가 484년, 488년, 490년 백제의 유주를 침공하였으나 488년 490년 대패하고 위는 망하는 길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백제의 가장 강력한 정복군주 동성왕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일제와 강단 사이비들은 백제와 위의 전쟁을 부인하거나 백제가 대륙에 진출해 개척한 중요하지 않은 지역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사기치고 있다.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유주를 탈환한 후 망할 때까지 유지하였다.

ㅇ 동수는 유주지역 전문관료로서 고위직을 섭렵하였고 장씨는 동수보다 하위직이었고 최종 시기에 대방태수를 한 번 하고 퇴임하였다. 둘 모두 고구려인이다. 동수는 요동군에서 태어났고, 장씨는 어양군에서 태어났다. 고구려의 유주(서진의 유주 평주)를 부정하는 이들은 강단 재야를 불문하고 사이비이다.

동수는 고구려인으로 413년 광개토대왕이 407년 정복한 하북성 지역에서 고구려 관리(요동 태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유주 요동군 출신의 고구려인이다. 영화는 장수왕의 연호로 469년부터 사용되었다고 보면 481년이 영화 13년이다. 현시력에 의하면 481년도 10월 1일이 戊子일이고 고구려의 독자적 역법에 의해서도 戊子일로 추측된다. 동수가 역임한 관직은 고구려의 관직이다. 물론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등이 위나라로부터 받은 관작으로 추측되지만 이는 고구려의 관리로서 장수왕이 위에게 요청하여 받은 것이므로, 실질상 고구려왕이 준 지위이다. 동수는 현지에서 태어나 우리말도 하고 현지어도 잘 하였으므로 낙랑 韓 창려 현도 대방 등 유주 지역 전문 관료로서 근무하다가 죽어서 가문의 묘지인 안악에 묻힌 것으로 추측된다. (한상고사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