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영산강왜의 전방후원분 관련 안정준의 주장(2024.910. 경남도민일보)에 대한 반론

역사회복 2024. 9. 11. 21:09

  1. 전라도의 전방후원분 관련

먼저 안정준은 "고대 일본(왜)의 문화가 강하게 드러나는 고분들"이라 하면서 일본과 왜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 왜를 동일시하는 것이 강단사이비들의 가장 큰 사기이다. 일본은 백제의 별칭이었다. 일본서기의 일본은 백제의 열도 지배 관료인 왜왕을 말한다. 왜집단은 백제의 주민이었고, 왜집단만의 독자적인 고대국가를 만든 적이 없다.

안정준은 전라도의 전방후원분이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과는 무관하지만, "다양한 이유로 일본에서 전라도 일대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 한다. 짧은 말이지만 안정준의 말에는 강단사이비의 소설이 집약되어 있다.

1) 야마토왜라는 고대국가는 없다.

강단사이비들은 영산강왜가 한반도에서 백제의 주민이었고, 열도로 건너가서는 고구려계 국가의 노예로서 나라의 개척에 사역되었고, 백제가 열도를 통일하자 다시 백제의 주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즉 열도는 우리의 역사강역임을 부인하기 위해 가공의 야마토왜 왕국을 주장한다.

영산강 어귀의 왜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전한 후 육지에서 신라를 침공하는 왜이다. 이들은 209년 가야와 싸웠던 포상팔국이기도 하다. 포상(浦上)은 강어귀의 마을이란 뜻이므로 포상팔국은 영산강 어귀의 왜를 의미한다. 영산강의 왜는 399년 이후 한반도에서 상당수가 사라진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에게 반격하기 위해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이에 지친 영산강 왜인들은 신라를 공격하라는 백제의 명령에 반항하여 집단적으로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광개토대왕릉 비문 399년조에, 내물왕이 왜인을 백성으로 삼아서 광개토대왕에게 보고했다고 기술되어 있고, 『삼국사』에도 399년 거듭된 전투로 징집이 증가하여 백성들이 신라로 달아나 호구가 줄어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북사』 「신라전」에도 군역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도 120현민이 신라로부터 403년부터 405년 사이에 열도로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399년 신라로 항복한 왜인들이 결국에는 열도로 보내진 사실을 말하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중의 하나이다. 그 이후로 전라도에서 신라 내륙을 공격하는 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전라도 왜는 전라도 지역의 전방후원분과 대형 옹관묘에 의해서 입증된다. 강단사이비들은 대형옹관묘가 마한의 유물이라고 사기치고 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가 CE9년에 망한 마한을 계속 살려 두라고 한 교시를 충실하게 지키기 위해 5세기 6세기에도 백제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였다고 사기를 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일본이 백제에 군수물자와 인력을 꾸준히 징발 당하고, 일본에 백제의 관료들이 임기제로 파견되는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한다. 강단사이비들은 백제와 일본이 선진문물과 군사지원을 주고받았다고 사기친다. 일제와 강단은 백제가 중국 남조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는 남조 왕조에게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하였는가? 백제는 남조에게 형식상 사대하였지만 군수물자와 병력을 바친 적은 없다. 선진문물과 군사력의 대가관계는 국가 사이에는 있을 수가 없다. 지방의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고 지방에 지배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내는 것은 중앙정부이다. 이 지방과 중앙의 관계가 일본서기에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열도는 백제의 영토였고 야마토왜라는 독립된 정치체는 열도에 존재한 적이 없다. [최재석의 연구를 보면 더 자세한 증거들이 기술되어 있다]

2) 열도에서 전라도로 이주?

안정준은 "예컨대 전라도 고창·영광·장성·담양·함평·해남·나주 등지에서는 고대 일본(왜)의 문화가 강하게 드러나는 고분들, 즉 '장고분'(혹은 '전방후원분')으로 불리는 무덤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즉 엄청난 이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증거는 없다. 그저 조선총독부 소설을 향한 끝없는 충성이 근거일 뿐이다.

전라도에서 열도로의 이주는 위에서 제시하였듯이, 삼국사 광개토대왕릉비 북사 일본서기 등 한중일의 다양한 문헌과 금석문으로 입증된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오직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야마토왜 왕국을 인정하고 야마토왜가 한반도로 사람들이 대규모로 이주할 정도로 강성하였다고 소설을 쓰고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광범한 지역에 왜가 이주하여 거주하면 도대체 그들이 주장하는 가공의 마한은 어디에서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많이 이주하였어도 마한은 그래 잘 살아 하고 승인했다면 그것은 복종인가 허락인가? 도대체 안정준을 비롯한 강단사이비들의 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2. 일본서기 인용 관련

강단사이비들이 꼭 하는 말이다. 일본서기를 그들 말대로 사료비판하여 역사 기술의 자료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강단사이비들의 문제는 일본서기를 날조하여 조선총독부 소설과 동북공정에 충성하는 사이비 학문을 한다는 것이다.

3. 임나=가야 관련하여

안정준이도 강단의 스테레오타입 사이비 날조 유사학설을 그대로 주장하고 있다.

1) 광개토대왕릉비의 임나

광개토대왕릉비 400년조는 절반이 지워졌다. 고구려의 열도정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열도의 북부를 점령하여 열도에 고구려와 백제의 남북국시대가 도래하였다. 경자년조만 절반이 지워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안정준이가 이것을 물리학적으로 입증하면 안정준의 말이면 무조건 믿겠다. 400년조만 유독 많이 지워진 것은 일제가 고의로 지운 것을 의미한다.

안정준이는 "당시 고구려군은 전투에 패해 달아나는 왜군을 쫓아서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이라는 지역에 이르렀다고 한다("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만약 이 기록의 '임나가라'가 일본 땅에 있었다고 본다면, 당시 5만의 고구려군이 한창 신라를 구원하다가 난데없이 일본 땅에서 출현한 것이 된다.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해석이다."라고 한다. 필자는 안정준이의 말이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다. 고구려군은 왜군이 열도로 도망가니까, 쫓아 가서 열도를 정벌하는데 뭐가 맥락이 없고 뭐가 난데없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고구려는 수군으로 백제의 한韓 지역을 평정한 바 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가 열도인을 시켜 신라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뿌리를 뽑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가, 백제가 열도인을 시켜 공격하자 신라를 구원하고 도망가는 백제의 열도군을 수군으로 추격하였다. 뭐가 난데없는가?

5세기 내내 백제는 열도에서 고구려에 반격하여 6세기 초에는 다시 열도를 완전히 장악한다. 그 과정이 백제 관료인 왜5왕의 표문에 적혀 있다. 왜왕이 별도로 송에 표문을 보낸 것은 열도의 세력가들에게 중국의 작호를 주어서 백제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안정준이는 임나가 가야임을 주장하고 싶다면 일본서기에 7세기 중반까지 나오는 임나가 왜 6세기 중엽에 망하는 가야인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면 된다. 김태식이처럼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가 가야라고 하면 개돼지나 믿지, 사람이 믿겠는가?

2) 진경대사탑비의 임나

다음에서 안정준이의 아이큐가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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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있는 신라의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에는 본래 김유신 가문의 후예였던 심희(審希)라는 승려가 나오는데, 그 조상의 성씨가 김(金)씨이고, '임나(任那)'의 왕족이었다고 기록됐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삼국사기>에는 김유신 집안이 원래 금관가야의 왕족이었다가 나라가 멸망한 뒤에 신라로 귀순해왔다는 내용이 전한다. 따라서, 진경대사탑비에 나오는 '임나'는 당연히 금관가야, 즉 경남 김해 지방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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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준의 논리는, "김유신의 후예인 진경대사의 선조가 임나의 왕족이었다. 김유신 집안은 신라로 귀순했다. 따라서 임나는 김해이다."이다. 필자는 안정준이처럼 고도의 아이큐 보유자가 아니라 안정준의 논리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고도의 논리를 개발하고 제시하는 안정준이는 사이비 역사학계의 쵝오 중의 쵝오라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안정준의 논리를 사이비 학계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들은 논리로 말하지 않고 총독부소설에 대한 충성으로 교감하므로 그들 사이에서는 쉽게 이해할 것이다.

3) 강수전의 임나

안정준은 계속하여 그의 아이큐를 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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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삼국사기> '강수 열전'에는 신라의 유명한 문장가인 강수가 "저는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입니다"라고 언급한 내용이 있다.

만약 위 기록들의 '임나'가 모두 일본 땅에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금관가야도 일본 땅에 있던 것이 되며, '임나'의 왕족이었던 김유신의 조상 그리고 신라의 유명한 문장가이자 본래 가야 출신이었던 강수도 모두 일본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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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가 열도에 있으면 왜 김해가 열도에 있는가? 안정준이는 우주인과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진경대사탑비에는 진경대사의 선조가 임나의 왕족이라고 했지, 김유신의 조상이 임나의 왕족이라 한 적은 없다. 안정준은 안 보이는 내용을 찾아내는 우주인 아이큐라 할 수 있다. 범인은 안정준과 토론할 수 없다.

안정준이는 [강수가 "저는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입니다"라고 언급한 내용이 있다.]고 말한다. 강단사이비들이 항상 사기를 칠 때 오역을 한다.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本은 선조(근본)를 의미하며, 任那加良의 加良은 음을 가라로 볼 수 있는데, 가라는 구루=城=마을=국가의 뜻이고 일족 친족 혈족 동족 등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이 문구를 “신은 본래 임나가야 사람입니다”라고 해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강수가 말한 임나가량이 가야의 고령이나 김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강수의 부 석체는 신라의 관직인 나마를 지냈다. 강수는 신문왕(재위 681-692년) 때 사망하므로 강수의 나이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강수는 가야가 멸망한 지 한참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고령이나 김해 사람들이 충주로 이주된 것은 6세기 중엽이다. 이주 후 적어도 50년이나 지난 후에 태어난 강수가 자신을 본래 고령이나 김해 사람이라고 할 리는 없다. 만약 강수가 말한 뜻이 강단유사사학이 말한 뜻이라면 강수는 반역죄로 처벌될 수도 있다. 가야가 망한 후 한참 후에 가야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으며, 그 아버지가 신라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 신라 왕에게 자신을 망한 가야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本은 선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한원의 내용 관련

강단사이비들이 말이 막히니 가지가지 짓거리를 한다. 한원 인용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한원》은 원래 아동 대상의 (훗날의 4-4-6-4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사륙병려문 창작을 위한) 대구(對句) 연습용 교재로 작성된 책이다. 역사서가 아니다.

한원의 저자 장초금은 신라가 진나라와 남조의 송나라 사이에 건국되었다고 기술한다. 그 근거는 원가 연간에(424~453) 왜왕 진이 사지절ㆍ 도독ㆍ왜ㆍ백제ㆍ신라․임나ㆍ진[한]ㆍ모한육국제군사를 자칭하였다.”라는 것이다. 왜왕 진이 말하는 신라는 열도의 신라마을이다. 즉 장초금은 열도의 신라마을과 한반도의 신라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역사학자라면 장초금처럼 신라가 진나라와 송나라 시기 사이에 건국되었다는 무식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한원의 다음 내용을 보면 안정준의 억지가 확실히 드러난다.

齊書云: “加羅國, 三韓種也.” 今訊新羅耆老云: “加羅ㆍ任那, 昔爲新羅所滅. 其故 [地]今並在國南七八百里.” 此新羅有辰韓ㆍ卞辰二十四國及任那ㆍ加羅ㆍ慕韓之地也. [남제서에 이르길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신라의 기로 들에게 물으니 대답하길 “가라ㆍ임나는 예전에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그 옛 [땅]은 지금 모두 나라의 남쪽 7~800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신라에는 진한ㆍ변진 24국 및 임나ㆍ가라ㆍ모한의 지역이 있다.]

위에서 가라와 임나를 신라가 멸망시켰다는 것은 열도의 신라마을에 관한 이야기이다. 장초금은 한반도 신라와 열도 신라를 구분하지 못하므로, 임나 가라 모한 즉 열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반도 신라에 연결시키고 있다. 진한 변한 24국은 서기전 24세기의 일이며, 변진은 서기전1세기에 자칭 진한과 원주민 변한이 합병한 나라 즉 韓의 신라이다.

한원의 신라 기술은 신라라는 글자가 써진 문장들을 아무렇게나 모아서 사륙병려문 교육을 위해 만든 문장이지 역사가 아니다. 강단사이비들은 입버릇처럼 사료비판을 떠벌리는데, 조선총독부 소설을 위해선 전혀 사료비판을 하지 않는다.

안정준이는 임나=가야라고 해놓고 "<한원(翰苑)>이라는 책에도 '임나'가 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된 나라라고 버젓이 소개되고 있다."고 버젓이 말한다. 그의 아이큐의 우주인성 천재성 아인쉬타인성을 다시 한 번 체감한다. 임나=가야이면 임나를 왜 가야와 함께 병합해야 하는가?

그리고 모한이 마한이라면 강단사이비들의 소설에서, 모한은 백제가 점령해야지 왜 신라의 영토가 되는가? 아인쉬타인보다 뛰어난 안정준만이 그 해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5. 임나일본부 극복 관련

안정준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강단 사이비들이 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하지 않는 듯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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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사학계에서는 <일본서기>에 보이는 '왜(야마토)의 한반도 정벌 기사' 부분에 대한 오랜 사료 비판 끝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왔으며, 이는 현재 일본 학자들과도 사실상 의견 일치를 이뤄낸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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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임나일본부설과 강단사이비 둘 모두 야마토왜가 열도를 장악한 고대국가라고 간주하여 열도를 우리 상고사의 강역에서 제외한다. 야마토왜는 실체가 없는 정치체다. 둘 모두 「일본서기」의 일본이 백제의 담로나 백제 관료인 왜왕임을 숨기기 위해 일본을 야마토왜로 날조하고 있다. 둘 모두 낙랑군을 보정시에서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 중국 동부와 북부의 우리 역사강역을 제외하고 있다. 둘 모두 BCE 24세기의 고조선을 부인하고, 『삼국사』의 사료가치를 불신하면서 한반도 남부는 소국들이 우글거리는 원삼국 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가 성립되며, 가야는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의 여러 소국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여러 마을국가의 명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 소국의 명칭이라고 날조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이 임나일본부의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을 안라국으로 축소하고, 그 성격을 외교기관으로 보므로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하나, 그들도 백제 신라 가야가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야마토왜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며, 일본 즉 열도백제가 열도의 마을국가를 통제하는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한반도 남부의 이야기로 보므로, 일제의 야마토임나설과의 차이는 극히 사소하다.

방법론적으로도 둘 모두 「일본서기」의 임나는 557년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가 될 수 없음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가야라고 우기며, 「일본서기」 249년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 우기며, 「일본서기」 임나는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문언을 무시하는 등 일제가 교시한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일본서기」를 철저히 무시한다. 둘 모두 유일한 근거는 음상사인데, 이마저도 가짜 음상사이며, 열도에 있는 진짜 음상사 지명은 모두 무시한다. 둘 모두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마을국가에나 적합한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철면피를 쓰고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에 적용시키는 코미디로 일관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한국사의 고대사 연표를 작성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의 청출어람은 「일본서기」 무시에서 두드러진다. 그들은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날조하면서, 전쟁과 정벌을 동맹과 통교라 하고, 「일본서기」 464년 2월 이야기와 관련하여선 구원군을 침략군이라 하고, 문언에 없는 고령의 야마토왜 군사기지를 창조하는 등 언어의 연금술사적 능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낙동강이 바다이므로 가야가 임나라는 놀라운 역사지리학의 업적을 선보이며, 임나4현과 관련하여선 놀라운 고생물학과 고인류학의 성과를 내놓기도 한다.

일제유사사학의 핵심적 날조인 야마토왜 실재설과 「일본서기」의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라는 억지에 동의하면서, 임나일본부의 성격이나 범위에 관해 말장난하는 것이 임나일본부설과의 대단한 차별점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며 대중을 속이고 일제유사사학의 날조를 퍼뜨리는 것은 그들이 일제유사사학의 주구임에 불과하다는 명확한 증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