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구지가의 재해석과 「가락국기」의 사실성

역사회복 2024. 9. 26.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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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

2. 『삼국유사』 「가락국기」 구지가 전후 부분

3. 구지가 해석

4. 「가락국기」의 사실성

5. 결

 

 

1. 서

 

구지가의 해석에 대한 기존 국문학계의 연구는 다양하지만, 그 해석은 자체 모순을 품고 있어 수긍하기 어렵거나, 『삼국유사』의 구지가 전후 부분과 문맥상 연결되지 않거나, 글자와 동떨어진 해석을 제시한다거나 하는 문제점이 있어 그 어느 것도 학계나 대중의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이를 핑계 삼아 기존 국사학계는, 수로왕의 CE 42년 건국을 기술하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사실성을 부정하고 가야의 건국연대를 2세기에서 3세기 전반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본고는 구지가 글자의 뜻에 부합하고, 자체 모순이 없으며, 구지가 전후 부분과 문맥상으로 연결되는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구지가는 수로왕 세력이 토착 세력의 지배층에게 요구했던 충성 맹세였고, 구지가와 구지가 전후의 「가락국기」 부분은 토착 세력과 수로왕 세력 사이에 실제 있었던 정치적 행위였음이 드러났다.

 

2. 『삼국유사』 「가락국기」 구지가 전후 부분

 

마침,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일컫는 것으로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에서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었다. 이삼백 명이 구지에 모여 있었는데 사람 소리 같은 것이 있었다.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며 말하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라고 하였다. 구간 등이 “저희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우리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라고 묻자, “구지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새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돼라.’고 하여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를 파서 번시의 자리를 만들고 ‘점괘가 무엇이든 점괘가 무엇이든. 그것이 나타나도 따르고 그것이 나타나지 않아도 따르겠습니다. 복골하고 받들겠습니다.’라고 노래를 불러라. 그리고 점괘를 이유로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것은 대왕을 맞이하게 된 것을 기뻐하여 춤추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수로왕 세력은 이미 토착 세력의 지배집단은 굴복시켰다. 그러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까지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민중들에게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정통성 있는 지배자임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수로왕은 토착인들의 복골 의식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토착 세력의 지배층은 3월 계욕일에 목욕재계하고 구지에서 복골 의식을 하는 전통이 있었다. 구지(龜旨)는 ‘복골의 뜻’을 의미하므로 복골의 점괘를 보는 곳이다. 복골도 하늘의 뜻을 묻는 의식이므로 구지는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이었을 것이다.

수로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수로왕은 복골 의식의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이를 따르도록 했다. 먼저 수로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도록 했다. 구지가의 내용이 충성 맹세이다. 충성 맹세를 한 후, 복골 의식을 진행하고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왕이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하면서 큰 동작으로 춤을 추라고 하였다. 큰 동작으로 춤을 추는 것은 산 아래의 민중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복골의 점괘가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왕이라는 것으로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당시의 복골 의식에 모인 이삼백 명의 토착 세력 지배층은 수로왕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였다.

 

3. 구지가 해석

 

龜何龜何 점괘가 무엇이든 점괘가 무엇이든.

首其現也 그것이 나타나도 따르고

若不現也 그것이 나타나지 않아도 따르겠습니다.

燔灼而喫 복골하고 받들겠습니다.

 

3.1 구지가의 형식

구지가는 4언 4구의 한시(漢詩)이다. 燔灼而喫也의 也는 없어야 의미가 자연스럽다. 也는 어조사(語助辭)로서 ‘~이다, ~느냐?, ~도다, ~구나’의 뜻이어서 충성 맹세의 어미로는 부적당하다. 일연도 구지가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也를 삽입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마지막 也를 없애고 해석한다.

 

3.2 세 번의 맹세

‘龜何龜何’는 첫 번째 맹세이다. 龜는 복골의 점괘이다. ‘점괘가 무엇이든, 점괘가 무엇이든, 복종하겠습니다’에서 ‘복종하겠습니다’가 생략되었다.

‘首其現也 若不現也’는 두 번째 맹세이다. 首와 若은 모두 ‘복종하다’의 의미이다. 也는 ‘또한, 역시’의 의미이다. 其는 ‘그것’인데 문맥상 ‘수로왕이 하늘이 보낸 왕이라는 점괘’이다.

‘燔灼而喫’은 세 번째 맹세이다. 燔은 희생을 굽는 ‘번시(燔柴)’의 의미이며, 灼은 구갑(龜甲)에 조짐(兆朕)을 보기 위해 뜨거운 불로 ‘구소(灸燒)’하는 것이다. 즉 燔灼은 복골 의식을 의미한다. 喫은 수(受)와 호환되는 글자로 ‘받아들이다’의 의미이다. 따라서 燔灼而喫은 형식적으로 복골 의식을 거치고 (점괘의 내용과 상관 없이) 수로왕을 수용하겠다는 의미이다.

수로왕은 같은 내용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맹세하게 하고 있다. 수로왕에게 정통성은 매우 중요하였고, 이삼백 명의 토착 세력 지배층이 함께 모인 것을 기회로 혹시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므로, 수로왕은 이들에게 세 번이나 충성의 맹세를 반복시켰다.

 

4. 「가락국기」의 사실성

 

본고와 같이 「가락국기」의 구지가를 포함하여 구지가 전후 부분을 해석하면 당시의 정치 상황이 선명하게 제시된다. 기존 견해는 구지가를 협박의 노래로 해독한 후, 구지가에 이어지는 “以之蹈舞 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도 “(노래를 부르)면서 발을 구르고 춤추어라. 그러면 대왕을 맞이하게 되어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以之’를 무시하고 ‘則是’를 왜곡하는 것이다. ‘以之’는 앞에서 기술하였듯이 ‘점괘를 이유로’로 해석해야 하고, ‘則是’는 ‘以之蹈舞’를 부연설명하기 위한 단어이다. 기존 견해처럼 ‘則是’를 ‘그러면’으로 해석하면 바로 이어지는 ‘九干等如其言咸忻而歌舞(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와 문맥이 연결될 수가 없다.

수로왕이 가장 신경 쓴 것은 복골 후의 토착 세력 지배층의 춤사위이다. 수로왕에게 중요한 것은 복골의 점괘가 아니다. 지배층은 이미 손아귀에 있다. 복골 의식의 핵심은 복골의 점괘를 믿는 다수의 민중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복골 의식에 참여한 토착 세력 지배층이 정말로 기뻐하면서 춤추는 모습을 연출해야 한다. “以之蹈舞 則是迎大王歡喜踴躍之也(점괘를 이유로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것은 대왕을 맞이하게 된 것을 기뻐하여 춤추는 것이다)”는 수로왕의 섬세한 연출이다. 우선 큰 동작으로 춤을 추라고 하였다. 또한 춤사위에 기뻐하는 모습을 담으라고 하였다. 민중이 그들이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정통성 있는 대왕을 하늘이 보내 주어 정말 기뻐하고 있다고 느끼게 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토착 세력 지배층은 충실히 수로왕의 명령을 이행하였다.

수로왕의 건국은, 나라를 만들었다는 것이 단순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민중으로부터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과정까지도 기록되어 있다. 시간과 장소와 방법과 등장 인물과 그들이 해야 할 역할까지가 영화처럼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CE 42년 가야의 건국을 부정하는 것은 사료 해독 의 오류에 불과하다.

 

5. 결

 

본고에서, 구지가 글자의 뜻에 부합하고, 자체 모순이 없으며, 구지가 전후 부분과 문맥상으로 연결되는 해석을 시도한 결과, 구지가는 수로왕 세력이 토착 세력의 지배층에게 요구했던 충성 맹세였고, 구지가 전후의 「가락국기」 기록은 수로왕이 토착인들의 전통적인 복골 의식을 이용하여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얻는 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국문요약

구지가의 해석에 대한 기존 국문학계의 연구는 다양하지만, 그 해석은 자체 모순을 품고 있어 수긍하기 어렵거나, 『삼국유사』의 구지가 전후 부분과 문맥상 연결되지 않거나, 글자와 동떨어진 해석을 제시한다거나 하는 문제점이 있어 그 어느 것도 학계나 대중의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본고에서, 구지가 글자의 뜻에 부합하고, 자체 모순이 없으며, 구지가 전후 부분과 문맥상으로 연결되는 해석을 시도한 결과, 구지가는 수로왕 세력이 토착 세력의 지배층에게 요구했던 충성 맹세였고, 구지가 전후의 「가락국기」 기록은 수로왕이 토착인들의 전통적인 복골 의식을 이용하여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를 얻는 과정으로 밝혀졌다.

 

핵심어: 구지가, 「가락국기」, 수로왕

 

 

[참고문헌]

 

『삼국유사』 「가락국기」

어강석, 「한문학적 관점으로 본 구지가(龜旨歌)의 재해석」, 『정신문화연구』 38.1 통권 13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248-278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네이버 한자사전

 

 

 

 

 

A Reinterpretation of Gujiga and the Historicity of the Garakgukgi

 

 

Abstract

 

While various interpretations of Gujiga have been proposed in existing Korean literature studies, they often contain inherent contradictions, fail to connect contextually with the preceding and following parts of the Gujiga in the Samgukyusa, or offer interpretations that are detached from the text itself. As a result, none of these interpretations have gained significant acceptance in academic circles or among the public. This paper attempts an interpretation that aligns with the meaning of the words in Gujiga, avoids internal contradictions, and maintains contextual coherence with the surrounding text. The findings suggest that Gujiga was a pledge of loyalty demanded by King Suro’s faction to the indigenous ruling class, and that the narrative surrounding the Gujiga in the Garakgukgi details King Suro’s strategic use of the indigenous people's traditional Bokgol rituals to win over the broad support of the populace.

 

Keywords: Gujiga, Garakgukgi, King Su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