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390

함안에 안라국이 있었다는 소설

다음은 안라가 함안이 아님을 알려주는 「일본서기」 관련 부분이다. (ㄱ) 249년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ㄴ) 552년 5월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中部) 덕솔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

역사 2024.07.09

성왕이 임나 재건을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는 소설

성왕이 임나 재건을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다음 이야기를 근거로 성왕이 김해 창원 영산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고 주장한다. (ㄱ) 541년 4월 여름 4월에 안라(安羅)의 차한기(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한기(卒麻旱岐), 산반해한기(散半奚旱岐)의 자식, 다라(多羅)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사이기한기(斯二岐旱岐)의 자식, 자타한기(子他旱岐)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미마나야마토노미코토모치)의 길비신(吉備臣;키비노오미)[이름이 빠졌다.]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서(詔書)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 천황이 조를 내린..

역사 2024.07.09

함안의 안라국이 임나 재건을 위해 안라회의를 주재하였다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안라회의와 사비회의라는 회의 형식의 새로운 코미디를 개발하여 소설 「야마토임나」를 풍성하게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위 「일본서기」 529년 3월 이야기를 근거로 529년 3월 함안의 안라국에서 김해 창원 영산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한 회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함안이 가야의 지방이 아니라 독립성이 강한 가야라고 보아 함안의 안라국이 회의를 주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에 의하면 함안이 아나가야 또는 아시량국이므로 함안이 안라국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안라가 아나나 아시량과 음상사라는 가짜음상사로 함안이 안라국이었다고 우긴다. 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백제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를 외교력으로 ..

역사 2024.07.09

「일본서기」의 남가라가 김해라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남가라가 김해라 주장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남가라는 김해일 수가 없다. 「일본서기」의 남가라 관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ㄱ) 249년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ㄴ) 527년 6월 21년 여름 6월 임신삭 갑오(3일), 근강모야신이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㖨己呑)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때 축자의 국조(國造) 반정이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 지 수년이 지났다. (ㄷ) 529년 3월 같은 달,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신라에 천황의 칙..

역사 2024.07.08

봉수망을 운영했다는 장수의 반파국 소설

일부 강단유사사학은 반파국이 장수를 수도로 하고 전라도 동부지방을 영역으로 한 가야연맹체의 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장수가 철의 생산과 유통으로 국력을 다져 봉수망을 구축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주장엔 전혀 근거가 없다. 그들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직은 반파국과 제철유적의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지만, 반파국 가야 고총에서 단야구와 편자를 중심으로 마구류, 무구류 등 지역색이 강한 철기류가 출토되어 그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일단 반파국이 봉화 왕국으로 융성하는데 철의 생산과 유통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것으로 유추해 두고자 한다. 이들 강단유사사학도 여타 강단유사사학처럼 고분이 가야식이라고 하면서 전라도 동부를 가야라고 주장하나, 묘제는 한반도 남부식이지 가야식이 아니다. 이들이 장수의..

역사 2024.07.06

가야가 평양의 낙랑군과 해상으로 교역했다는 소설

가야는 평양의 낙랑군과 해상으로 교역했다전술하였듯이 新錢(소위 왕망전)은 김해를 중심으로 남해안과 제주도 대마도 구주 북쪽에서 상당량이 발견되며, 강단유사사학이 한4군 지역이라 사기 치는 북한과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미미하게 확인된다. 이는 왕망 정권의 실세였던 김씨 집단이 김해로 도망 온 것을 의미하며 CE 42년의 가야 건국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王莽錢, 김해 良洞里 토광묘의 後漢代 尙方鏡, 창원 茶戶里 목관묘에서 나온 前漢代 星雲鏡·五銖錢·琴形帶鉤·小銅鐸, 창원 성산패총에서 나온 五銖錢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 대로 新錢이 평양의 낙랑군과 가야의 교역에 사용되었다면 낙랑군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한다. 따..

역사 2024.07.02

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 영토가 아니라는 강단유사사학

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 영토가 아니다강단유사사학이 기문국이라 주장하는 남원의 고분에서 백제의 금동신발, 청동거울, 계수호가 출토되었다. 지방세력에게 하사하는 위세품이 백제의 것이라면 당연히 그 지역은 백제가 지배한 지역이지 가야일 수가 없다. 충청도 전라도 모두 백제의 위세품이 발굴되므로 처음부터 백제의 영토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같은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충청도는 백제, 나주는 마한, 기문은 임나=가야라 주장한다. 그들이 백제 영역이 아니라고 사기 치는 곳에서 발굴되는 백제 위세품은 그 지역의 독립국이 백제와 교섭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세품은 백제의 지방통제방식이므로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열도 등 백제의 위세품이 나온..

역사 2024.07.01

가야의 서부 확장은 소설 야마토임나의 하일라이트

강단유사사학은 사료의 글자 날조와 횡설수설과 고도의 가짜 음상사 기법을 통해 가야가 전라도로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야의 확장은 없었다. 가야는 백제와 싸울 수 없다. 신라와 싸우기도 벅찼다. 백제는 김수로 집단의 한반도 이주에 도움을 주었던 나라로 추정되나, 신라는 탈해왕이 60년경 가야를 정복하려 하였다. 처음 신라와 가야는 비슷한 소국이었고, 백제는 대국이었다. 가야가 대국인 백제를 적으로 하면 뒤에서 신라의 침입을 받게 된다. 백제는 가야를 존치시켜 신라를 견제하게 한 후 고구려에 대비할 수 있었으므로 가야와 적대적일 필요가 없었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4세기 말부터 백제가 약해졌고, 신라는 국력이 커지면서 고구려에서 독립하기 위해, 5세기 중엽부터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

역사 2024.07.01

백제영토를 임나로 날조하는 강단유사사학

기문과 대사를 각각 남원과 하동으로 보는 주류 강단유사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한다. 백제의 남방경영과 대가야의 西進政策이 부딪쳐서 대가야와 백제는 「己汶」을 놓고 영역을 다투게 되는데, 당시에 기문은 대가야에 속해 있었다. 이 사실은≪백제본기≫를 토대로 하여 개작된 듯한≪日本書紀≫소재의 사료에 보인다. 여기서의 기문은 가야 계통 국명의 하나로서 ≪新撰姓氏錄≫ 吉田連條에 上·中·下의 3기문이 나오고, ≪梁職貢圖≫ 소재의 百濟旁小國 중에 상기문이 나오며, ≪삼국사기≫ 樂志의 우륵 12곡명 중에 상·하의 奇物이 나온다. 기문은 상·하 또는 상·중·하로 나뉘는 것으로 보아 넓은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남원(옛 지명 古龍郡) 및 임실(옛 지명 任實郡 居斯勿縣)지방으로 비정된다. 그들..

역사 2024.07.01

6세기 초 백제의 열도 소국간 구역 조정

강단유사사학이 기문을 남원, 대사를 하동이라 주장하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일본서기」의 반파, 기문, 대사 관련 부분은 열도의 마을국가 사이에 발생한 사실이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임나4현의 소속 변경도 동일한 성격의 행위이다. 임나4현이나 기문 대사 다사진의 마을국가간 이동은, 6세기 초 백제가 고구려의 열도 위성국으로부터 열도를 완전히 탈환한 후, 고구려계 지배하의 기존 마을국가들간 역학관계를, 백제의 지배에 편하도록 재편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일본서기」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ㄱ) 513년 6월그리고 따로 “반파국(伴跛國)이 신의 나라의 기문(己汶)이라는 땅을 약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바르게 판단하여 원래 속한 곳에 돌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ㄴ) 513년..

역사 2024.07.01

임나4현 전남설=강단유사사학이 밝힌 고인류학 고생물학의 성과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 512년 이야기를 전라남도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여 임나4현의 위치를 비정한다. 그들은 주장자마다 음상사학에서 일가를 이루어 서로 다른 위치를 주장하고 있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음상사를 통해 임나4현을 경남, 전북, 충남, 경북, 전남, 부산 등 다양한 위치에 비정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주로 섬진강 유역의 전남 동부지역으로 비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현을 군단위 이상으로 보아 4현을 4군 이상의 영역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원문은 임나4현을 아주 작은 마을로 보고 있다. 이들이 근거로 하는 「일본서기」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 512년 12월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任那國)의 ..

역사 2024.06.29

근거 없이 창작한 가야사 시대구분

필자는 앞에서 『삼국사』,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석이정전』과 『석순응전』 등 객관적 사료에 의해 3세기 말 토착세력이 김수로계로부터 가야 왕권을 탈취하였음을 입증하였다. 그런데 강단은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추종하기 위해 어떤 근거도 없이 가야사를 난도질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야사를 구분하고 있다.   문헌상으로 보아 「가야」라는 이름을 쓰는 국가는 둘이 있다. 400년경까지는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라고 칭하였고, 5세기 후반 이후로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가야라고 칭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보아 4세기 이전의 문화 중심은 김해지역이고, 5세기 이후의 문화 중심은 고령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일단 4세기 이전을 전기 가야시대, 5세기 이후를 후기 가야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역사 2024.06.28

『삼국사』 「강수전」의 임나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本은 선조(근본)를 의미하며, 任那加良의 加良은 음을 가라로 볼 수 있는데, 가라는 구루=城=마을=국가의 뜻이고 일족 친족 혈족 동족 등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이 문구를 “신은 본래 임나가야 사람입니다”라고 해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강수가 말한 임나가량이 가야의 고령이나 김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강수의 부 석체는 신라의 관직인 나마를 지냈다. 강수는 신문왕(재위 681-692년) 때 사망하므로 강수의 나이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강수는 가야가 멸망한 지 한참 후에 태어..

역사 2024.06.27

한반도 남부 삼한론 (=원삼국론)의 소설성

삼한 남한론(=원삼국론)은 조선총독부의 소설강단유사사학은 『삼국사』, 『삼국유사』, 기타 중국 사서 등에 전혀 근거가 없음에도, 한반도 남부에는 원래 진국이 있었고, 진국은 韓으로 통칭되기도 하였는데, 점차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BCE 3~2세기 이른바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점토대토기문화 또는 세형동검문화를 영위하던 세력집단이 진국이었고, 진국으로 남하한 준왕과 역계경, 예맥조선 멸망 시의 유이민으로 인해 진국이 해체되지만, 그 핵심 세력은 BCE 1세기 초 이전에 중서부지역에 마한과 중부 이남지역에 변한 그리고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지역에 진한을 세운다고 하면서, 현재까지는 이같은 사실을 문헌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도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사료가 없..

역사 2024.06.23

강단유사사학이 멋쩍어서 날조한 창녕비 관경비설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임나의 멸망에 대해 뜬금없이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참고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갑자기 창녕비를 들고나온다. 그들은 창녕비에 순수관경이라는 문구는 없어도 창녕비를 척경비(拓境碑)나 순수관경(巡狩管境)비로 볼 수 있어, 창녕이 당시 가야와 국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흥왕이 창녕까지 巡守해 와서 軍勢 시위를 하고 일련의 사면조치도 취하였고, 이는 가야연맹 제국에 대하여 위협과 유화의 시위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창녕비문 어디에도 순수관경이라는 문언이나 척경이라는 문언이 없다. 창녕비 어디에도 군세 시위를 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의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① 제목[題記] ② 순수배경과 경과[紀事] ③ 왕을 수행한 사람[隨駕人名列記]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역사 2024.06.09

강단유사사학은 가야 멸망 시엔 ‘가야=임나’를 부정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에 대해선 철저히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가야=임나라고 소설을 쓰면서 「일본서기」의 임나를 가야라고 우기다가, 갑자기 가야의 멸망에 대해선, ‘가야의 반란’이라는 문언은 무시하지만,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참고하여 562년에 가야가 망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562년 이후에도 신라와 전쟁을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임나가 7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등장하는데, 그들도 7세기까지 임나를 한반도에 존치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꼈는지, 태세전환하여 562년 임나(가야)가 망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가야가 망한 후에도 「일본서기」에 왜 임나가 나오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선생님들이 교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의 소설에 대한 무조건적 ..

역사 2024.06.09

강단유사사학의 불교 전래에 관한 사기 번역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삼국유사』 「塔像第四」 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許皇后名黄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陁國所載來. --- 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圡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해동에 절을 세워 불법을 받드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대승불교(像敎)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

역사 2024.06.08

고구려, 양광에게 현실 자각 타임 선사

양광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년 동안 전쟁준비를 한 후, 612년 11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당하를 건너 요동성 등 국경 부근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장안성(금주)으로 바로 보낸 수군도 패수(소릉하)에서 대패했고, 별동대 30만을 장안성에 보냈으나 보급 실패로 굶주려서 후퇴하다 살수(연태하)에서 거의 다 죽었다. 본고의 위치 비정은 당시의 양광 조서로 입증된다. 양광은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혼미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들면서 요(遼) 예(濊)의 경계를 자주 잠식하였다.”라고 하므로, 갈석산이 낭아산이고, 요수가 당하이고, 예가 황하 어귀 해안가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는 본고의 위치비정과 양광의 언급은 일치한다. 양광은 “발해를 덮어 우레와 같이 진동하고 부여..

역사 2024.06.06

양견의 허세와 굴복

양견(수문제)이 597년 “王은 遼水의 폭이 長江과 어떠하며, 高麗의 인구가 陳國과 어떠하다고 보는가?” 하면서 고구려를 위협하는 문서를 보내자, 고구려는 598년 濊 군사 일만으로 요서(당하 상류 남부)를 공격하였다. 濊병은 황하 하류 예인이나 예부여의 예인이다. 고구려의 공격에 영주총관 위충이 대응하자 후퇴하였다. 양견은 예상치 못한 고구려의 치고 빠지기에 당황하고 분노하여,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서둘러서 6월 양량과 왕세적을 장군으로 30만을 임유관을 통해 고구려로 보내고, 식량은 배로 황하로 보내려고 하였는데 강이식은 이를 눈치채고 보급선을 파괴하고 성을 지키면서 시간을 끌자 수의 병사들은 굶주려 병에 걸리는 상태가 되었다. 9월 수군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자, 고구려군은 임유관까지 추격하..

역사 2024.06.06

온달의 북주 침략 격퇴

북주가 우문옹(무제) 시 요동에 침입하였는데, 배산(拜山)의 벌판에서 온달의 활약으로 크게 이겼다. 위가 북제와 북주로 나뉘고 북주가 577년 북제를 멸한 후 고구려와 경계를 마주하여 북주가 침입하였다. 『태백일사』는 갈석산과 배찰산에 가서 토벌하고 유림관까지 추격했다고 하며, 유림은 산서성과의 경계라 한다. 배산의 벌판은 갈석산에서 남쪽으로 더 간 배찰산 부근, 보정시 남쪽의 벌판으로 추정된다. 유림관은 임유관의 다른 명칭으로 추정되며, 산서성과의 경계이므로 보정시 남쪽에서 서쪽으로 산서성으로 가는 도정의 태행산맥에 있는 관으로 추정된다. 북주나 수는, 상곡은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상곡과 거용관으로 나올 수 없고, 거용관에서 직선거리로 50km 남쪽의 임유관을 통해 요동으로 나와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침..

역사 2024.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