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성왕이 임나 재건을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는 소설

역사회복 2024. 7. 9. 04:58

성왕이 임나 재건을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다음 이야기를 근거로 성왕이 김해 창원 영산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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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에 안라(安羅)의 차한기(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한기(卒麻旱岐), 산반해한기(散半奚旱岐)의 자식, 다라(多羅)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사이기한기(斯二岐旱岐)의 자식, 자타한기(子他旱岐)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미마나야마토노미코토모치)의 길비신(吉備臣키비노오미)[이름이 빠졌다.]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서(詔書)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 천황이 조를 내린 바는 오로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이제 어떤 책략으로 임나를 재건할 수 있겠는가. 모두 각자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뜻이 펼쳐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임나 한기들은 이전에 두세 차례 신라와 의논하였으나 회답이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바를 다시 신라에 알린다고 해도 여전히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함께 사신을 천황에게 보내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대왕(大王)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삼가 교지를 받드는 것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임나의 국경이 신라와 접해있기 때문에 탁순 등이 화를 입은 것이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등이라는 것은 탁기탄(㖨己呑), 가라(加羅)를 말한다. 탁순 등의 나라처럼 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명왕은 옛날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 등이 처음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하고 두텁고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어 자제(子弟)가 되어 항상 번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신라에 속아 천황의 분노를 사고 임나의 원한을 산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후회하고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麻鹵), 성방(城方) 갑배매노(甲背昧奴) 등을 보내 가라에 가서 임나의 일본부를 만나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이후 이 일을 계속 염두에 두어 임나를 세우는 계획을 조석으로 잊지 않았다. 지금 천황이 조를 내려 속히 임나를 세워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그대들과 함께 모의하여 임나 등의 나라를 수립하고자 한다. 마땅히 잘 계획해야 한다. 또한 임나의 국경에 신라를 불러 조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묻겠다. 동시에 사자를 보내 천황에게 주상하여 삼가 교시를 받겠다. 만약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나를 침공하면 나는 반드시 가서 구할 것이다. 걱정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방비를 잘하고 조심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대들이 탁순 등이 화를 입은 것이 두렵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스스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서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망한 것이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멸망한 것이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이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힘과 마음을 합쳐 천황의 힘을 빌리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모두 기뻐하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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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일본부의 신과 임나의 집사를 불러 천황에게 보낸 나솔 득문과 허세 나솔 기마, 물부 나솔 가비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지금 일본부의 신과 임나국의 집사는 마땅히 와서 칙명을 듣고 함께 임나의 일을 협의하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길비신(吉備臣), 안라의 하한기(下旱岐)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가라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군(卒麻君), 사이기군(斯二岐君), 산반해군(散半奚君)의 아들, 다라의 이수위(二首位) 흘건지(訖乾智), 자타한기(子他旱岐), 구차한기(久嵯旱岐)가 백제에 이르렀다. 이에 백제의 성명왕이 조서의 개요를 알리며 나는 나솔 미마사, 나솔 기련, 나솔 용기다 등을 일본에 보냈다. 그러자 (천황이) 조를 내려 빨리 임나를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또 진수련이 칙을 받들어 임나를 세웠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따라서 모두를 부른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임나를 세울 수가 있을 것인가. 각자의 계책을 말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길비신, 임나한기 등이 무릇 임나국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대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왕을 따라 함께 주상하여 칙을 듣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명왕이 임나국은 우리 백제와 예부터 지금까지 자제와 같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지금 일본부의 인기미(印岐彌)[임나에 있던 일본의 신하의 이름이다.]는 이미 신라를 쳤고 이번에는 우리를 치려고 한다. 또 기꺼이 신라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무릇 인기미를 임나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해하려 한 것이 아니다[잘 알 수 없다.]. 예부터 신라는 무도하다.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깨고 탁순을 멸망시켰다. 신뢰하는 나라로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오히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를 불러 같이 은조(恩詔)를 받들어 임나국을 일으키고 계승시켜, 옛날과 같이 영원히 형제가 되기를 바란다. 듣건대 신라와 안라 양국의 국경지역에 큰 강이 있는데 요해의 땅이라고 한다. 나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6성을 쌓으려 한다. 삼가 천황에게 3천 명의 병사를 요청하여 성마다 5백 명씩 두고, 이곳을 우리 병사와 함께 신라가 경작하는 것을 막으면 구례산의 5성은 자연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이다. 탁순국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요청한 병사에게는 내가 의복과 식량을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려는 첫번째 계책이다. 남한에 군령과 성주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의 뜻을 거스르고 조공하는 길을 막는 것이 되겠는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강적을 물리치는 것이다. 무릇 저 흉악한 무리는 누구와도 손잡으려 할 것이다. 북적(北敵)은 강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다. 만일 남한에 군령과 성주를 두어 수리하고 방어하지 않으면 이 강적을 막을 수가 없다. 또한 신라도 누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하여 임나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멸망하여 조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고자 하는 두 번째 계책이다. 또 길비신, 하내직, 이나사, 마도가 계속 임나에 머문다면 천황이 임나를 세우라는 조를 내리더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 네 명을 이주시켜 각각 본읍(本邑)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이것이 천황에게 주상하려 하는 세 번째 계책이다. 일본의 신()과 임나의 한기 등과 함께 사자를 보내 같이 천황에게 주상하여 조를 받들겠다고 청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길비신과 한기 등이 대왕이 말씀하신 세 가지 계책은 우리의 마음과도 맞습니다. 지금 돌아가서 일본의 대신(大臣)[임나에 있는 일본부의 대신을 말한다.]과 안라왕과 가라왕에게 삼가 보고하고 함께 사신을 보내어 같이 천황에게 주상하겠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심사숙고하여 계책을 세워야만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위 이야기에 의하면 사비회의 참석자는 다음 표와 같다.

 

[사비회의 참석자]

5414 544 11
安羅
加羅


多羅


呑奚大不
位古殿


夷他


岐大不
位古殿


訖乾


 

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임나의 주도국으로 신라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백제는 임나 부흥보다는 고구려와의 대결을 위해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하여 성과가 없었다거나, 안라가 친신라 경향이 있었고 백제는 이러한 정황을 반전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고 분석하기도 하면서 일본서기의 이 부분을 한반도의 사실로 주장한다.

그러나 541년 현재 가야는 대가야 즉 합천과 고령(성산면 포함)만 남고 모두 신라에 점령된 상태인데, 소위 사비회의에는 임나십국 중 8국이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가야의 실질적 리더로서 회의에 참석한다고 하거나 백제가 안라의 친신라경향을 반전시키려 회의를 개최하였다고 하여 안라를 회의의 중요한 국가로 보고 있는데, 함안은 법흥왕 시에 이미 신라에 점령당하여 아무리 늦어도 540년엔 신라의 영토이다. 그리고 함안은 대가야의 지방이었던 곳으로 가야의 리더가 될 수도 없다. 또 신라가 가야를 잠식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견해에 의하여도 가야의 구성국인 안라가, 친신라경향이었다는 것은 앞뒤가 불일치하는 그들의 공상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열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반도의 이야기로 날조하기 위해 가야를 근거 없이 여러 갈래로 찢어놓고 있다. 물론 그들은 삼국사법흥왕의 함안 점령 기록도 날조라 주장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기존의 견해들에서도 지리지의 기록은 신라의 安羅 통합에 관련된 어떤 전승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한편, 安羅의 신라에로의 통합을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라고 한다. 객관적 사료를 부정하는 그들의 상투적 표현은 어떤 전승이 반영된 것이다.

전술하였듯이 안라는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이고, 6세기 초 이전에 모든 고구려계 국가는 백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안라는 한반도의 가야와는 전혀 무관한 나라이므로, 소위 사비회의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열도의 일이다. 성왕이 등장하는 것은 열도의 백제마을을 본국백제로, 열도백제의 관료인 왜왕을 일본천황으로 변개하기 위한 날조에 불과하다. 대가야 이외에 안라가야가 있다는 것도, 함안이 신라의 가야 잠식 과정에서 친신라적이었다는 것도, 백제가 함안의 친신라경향을 반전시키기 위해 수년에 걸쳐 사비회의를 도모하였다는 것도 모두 코미디이다. 가야 전체가 557년에 망해서 562년에는 신라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함안의 안라가 560년까지 존속했다는 그들의 주장도 코미디이다. 더구나 안라가 함안이 아님은 일본서기에 의해 입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