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안라가 함안이 아님을 알려주는 「일본서기」 관련 부분이다.
(ㄱ) 249년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ㄴ) 552년 5월
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中部) 덕솔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 또한 임나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또한 황공하신 천황의 영위에 의한 가호가 있을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ㄷ) 554년 12월
겨울 1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과 안라의 여러 왜신들, 임나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이 아룁니다. 사라(斯羅)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과 마음을 같이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ㄱ)에서 369(249+120)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안라를 점령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함안은 가야이지 신라가 아니다. 「일본서기」의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안라를 한반도의 나라로 왈가왈부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된다.
(ㄴ)에서 552년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한다고 하는데, 550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지친 틈을 타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취하였고, 551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았고, 553년에는 백제의 한강 이북을 점령하여 신주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백제 땅도 차지하여 한반도에선 고구려는 신라와만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신라에 도살성과 10군을 빼앗겼고 신라가 이를 돌려주지도 않았으므로 신라와 통모할 이유가 없다. 553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에선 백제를 공격할 수조차 없다. 전술하였듯이 554년 백제 웅천성 공격은 韓에서의 공격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공모하여 백제와 가야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게 되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가 화친하여 신라를 견제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ㄷ)에서 사라와 박이 바다 북쪽의 미이거를 공격하려 한다고 백제 안라 임나가 말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박국이 고구려라 하며, 미이거는 백제와 임나를 의미한다고 한다. 바다 북쪽이라 표현했으므로 열도의 지명을 의미한다 추정되지만, 미이거가 한반도의 백제와 임나를 의미한다는 강단유사사학의 견해에 따른다 하더라도, (ㄴ)과 관련하여 기술한 바와 같이, 신라와 고구려가 화친하여 백제를 공격한다는 것은 한반도에선 불가능한 상황이므로 열도의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소위 안라회의와 사비회의를 한반도의 일로 보는 근거는 「일본서기」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이 이러한 회의를 한반도의 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야마토임나설 즉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심 이외에는 없다. 『삼국사』는 절대로 믿지 않고, 열도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일본서기」는 어떻게라도 왜곡 날조해서 임나를 한반도의 가야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굳은 다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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