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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이 천도한 웅진은 황하 동쪽

문주왕이 475년 천도한 웅진은 韓의 웅진이다. 문주왕은 천도 이듬해인 476년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대두산성은 온조왕이 마한을 CE 8년 멸망시킨 직후인 CE 9년 쌓은 성이므로 韓 지역에 있는 성이다. 마한을 멸망시킨 후 1년만에 한반도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두산성은 웅진 북쪽이며 한수 이북과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웅진이 수도가 되었으므로 웅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시켜야 하며, 주민을 멀리 이동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웅진을 한반도 웅진으로 보며, 대두산성을 주로 아산 일대로 보는데, 이는 소설에 불과하다. 한수 이북의 주민을 아산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공주 남쪽의 산성을 강화하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대..

역사 2024.07.28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이유

전술한 바와 같이 소서노의 위례성(미추홀)이 BCE 18년 건국 시 도읍지이고, BCE 5년 온조의 찬탈 시 온조의 위례성(서도 한성)이 두번째 수도이다. 두 위례성은 모두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에 있었다. 그 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근초고왕이 동도 한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를 제외하고는 서도 한성이 백제의 수도였다.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것은 서울이 근초고왕 시기에만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역사 2024.07.28

서동은 왜 선화공주와 혼인해야만 하였는가?

서동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혼외 왕족이다. 서동은 어머니와 익산에서 살면서 마를 캐다 사금을 발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부자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으로 인해 서동은 백제의 귀족과 혼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동은 신분세탁을 위해 신라의 공주와 혼인하려 하였고 이왕이면 백제에까지 미인으로 소문 난 선화공주로 결정하였다. 서동은 한편으론 진평왕에게 막대한 금을 선물하였고, 한편으론 선화공주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다.  서동은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부를 잘 활용하여 귀족들의 인심을 얻었고, 혜왕 법왕이 연이어 재위 2년만에 사망한 상태에서, 왕위를 승계받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의 서동 선화공주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가지가지의 소설을 쓰고 있다.  ..

역사 2024.07.26

선화공주는 설화상의 허구 인물인가?

일부 강단유사사학자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비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설화이므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거가 가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택왕후 설명“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사택왕후는 재물을 희사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639년(무왕 40)에 사리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비는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아니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무왕은 641년 재위 42년에 사망하였다. 639년 당시 사택왕후가 무왕의 비라고 선화공주가 무왕의 비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입증이란 말을 이렇게 쉽게 하는 그들의 뇌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당시 왕비가..

역사 2024.07.26

강단 사기꾼들의 견당매물사 날조

『입법구법순례행기』의 원문廿八日. 大唐天子差入新羅慰問新即位王之使, 州青兵馬使吴子陳· 崔副使· 王判官㝳卅余人登來寺裏相看. 夜頭張寶高遣大唐賣物使崔兵馬司來寺問慰.(839년 6월) 28일 당나라 천자가 새로 즉위한 왕을 위문하기 위해 신라로 보내는 사신인 州青兵馬使 오자진(吳子陳)과 최부사(崔副使) 그리고 왕판관(王判官) 등 30여 명이 절로 올라왔으므로 만나보았다. 초저녁 장보고가 보낸 大唐賣物使 崔兵馬司가 절에 와서 위문하였다.​ㅇ 大唐賣物使의 의미- 원문에 의하면 遣은 장보고가 엔닌에게 보냈다는 의미이고, 遣大唐賣物使란 직책은 없음. - 최훈의 직책은 大唐賣物使 겸 兵馬司로 당나라의 관직명임. - 대당매물사는 당의 물건을 파는 당나라의 수출관이란 의미임.- 최훈은 당나라 치청절도사 지분이 있는 무역선의 선..

역사 2024.07.25

경기도가 조조 위나라 영토였다는 강단 사기꾼들

『삼국지』에 의하면 245년경 조위는 辰韓 여덟 마을을 낙랑군에 귀속 시키려 했는데 韓이 반발하여 대방군을 공격하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韓을 침략하여 궁준이 전사하였지만 韓을 滅하였다. 진수는 韓을 멸하는 기사 바로 앞에서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다 하므로 멸했다는 것은 복속시킨 것이 아니라 韓이라는 정치체가 있었다면 그것을 말 그대로 없앴음을 뜻한다. 여기의 韓은 황하 이동으로 황하 서쪽에 위치하게 되어 황하 동쪽의 韓백제에서 분리되었고, 그 결과 조위에 쉽게 멸망되었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辰韓이 4세기까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없다. 임나 선생님께서 4세기에 들어오시므로 4세기까지는 辰韓이 죽어도 버텨줘야 하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역사 2024.07.24

강단유사사학에선 남쪽과 동쪽은 같은 말

강단유사사학은 근거도 없이 辰國을 한반도 중남부라 주장한다. 그들은 역계경이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는 말을 남하한 것으로 변경하며, 韓을 한반도 남부라 주장하고. 辰國과 韓이 모두 한반도 중남부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준왕이 바다를 건너 남쪽의 韓으로 갔다고 하며, 『위략』은 역계경이 동쪽 辰國으로 갔다고 하므로,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그들은 요서에 위치한 전삼한의 辰韓=辰國을 부정하여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지워버리고 있다.

역사 2024.07.24

네가 辰國을 모르면 너는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

辰國은 단군조선 이래 요서를 차지한 우리 민족의 중심국을 지칭하는 말범엽이 삼한이 모두 옛 辰國이라 한 것은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사서에 『단군세기』와 같은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수가 신한(辰韓)이 옛 신국(辰國)이라고 하였는데, 신한을 부를 때 辰國이라 하기도 하였다는 것과, 조선의 천자국을 일반적으로 辰國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부여나 북부여를 부를 때도 조선의 천자국(중심국)이라는 의미로 신국(진국)이라 하였을 것이다. 역계경이 우거와 정책 차이로 예맥조선을 떠나 동쪽의 辰國으로 갔는데, 역계경 집단이 예맥조선과 무역하는 나라와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당시 예맥조선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북부여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소위 발해의 국호가 진국(震國)..

역사 2024.07.24

난하설의 모순과 폐해

난하설의 자기모순재야유사사학은 강단유사사학처럼 후삼한남한설을 추종한다. 후삼한남한설은 좀비 삼한과 결합하여 야마토임나설이 된다. 난하설에 의하면 강단유사사학의 말처럼 소위 후삼한이 바닷속에 있게 되는데도, 재야유사사학은 아무런 설명 없이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인다.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이면, 초기 신라와 백제가 낙랑 동부도위와 인접하여 있으므로 낙랑군이 북한에 있고, 공손씨와 조위가 한반도남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이면서, 낙랑군 평양설을 공격하고, 공손씨와 조위가 韓을 지배했다는 기사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나 설명도 없이, 공손씨와 조위가 남한을 지배했다는 주장에 분노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난하설의 폐해난하설에 따르면 韓을 발견할 수 없다. 韓을 발견하지 못하면 ..

역사 2024.07.21

재야유사사학이 토론을 거부하는 난하설의 소설성

재야유사사학이 토론을 거부하는 난하설의 소설성난하 갈석산설(창려 갈석산설)은 역사날조 총책 담기양이 제조한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다. 윤내현이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는 근거는 요수가 난하라는 것과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다. 윤내현은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라고 하나, 이는 요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실질상 윤내현은 난하가 요수라는 단 하나의 근거로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난하가 요수였던 적은 없다. 윤내현은 『여씨춘추』 「유시람」 고유 주석을 근거로 난하가 요수라 하나, 본고에서는 고유가 말하는 요수가 중역수임을 밝힌 바 있다. 무엇보다도 갈석산에 대해 주장하려면, 요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보다 갈석산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는 것이 ..

역사 2024.07.19

재야유사사학의 소양 부족

​ 재야유사사학도 강단유사사학처럼 토론을 거부한다. 정확히는, 재야유사사학은 학문적 소양이 부족하여 학문적 토론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학문적 능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주장을 방어하지 못하면 그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함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강단과 재야는 토론하지 않는다. 물론 강단은 거의 다 틀렸고, 재야는 강단보다는 덜 틀렸지만, 대중은 강단의 권위에 복종하므로 강단유사사학은 유지된다. 재야유사사학의 가장 큰 오류는 난하 갈석산설이다. 난하 갈석산설은 강단유사사학으로부터 삼한을 바닷속에 있게 하는 유사사학이라 공격을 받아왔다. 학문이 되려면, 난하설에 따르더라도 후삼한이 바닷속에 빠지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해야 하고, 반론을 못하면 난하설을 철회해야 한다. 그래..

역사 2024.07.19

유시민의 토착왜구성

소위 보수는 매국노를 계승하였으므로 그들이 토착왜구 행태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위 진보도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한다. 강단유사사학에 속하지 않는 진보 지식인이라면 강단유사사학 해체를 주장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 지식인들은 강단유사사학을 명시적으로 옹호하거나 강단유사사학에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음으로써 강단유사사학 생태계의 구성부분이 되고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유시민이다. 유시민은 박유하의 처벌을 반대하여 서명한 사람이다. 유시민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 그는 역사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모든 분야의 지식이 부족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하였다. 그의 역사책은 베스트셀러이다. 그가 쓴 역사책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 「나의 한국 현대사」, 「역사의 역사」,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

역사 2024.07.18

한국과 일본 사회 저질성의 원인

일본은 스스로를 뿌리 없는 민족이라 가르친다.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그들의 조상이고, 열국의 일원으로 우리 역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므로 그들은 조상을 찾을 수 없다. 조상이 없으면 즉 역사가 없으면 자기정체성이 있을 수 없다. 일제 전범들의 자기부정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전범들 즉 무식한 하급 무사들의 맹목적 국가주의가 현재 일본의 이념이다. 그래서 일본 사회는 저질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우리 역사 부정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한국 사회도 저질이다. 우리 조상은 중국 주변의 미개인들로서 중국의 문화로 개화되었고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으며, 남쪽은 야마토왜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인식한다. 홍익인간의 이..

역사 2024.07.18

강단유사사학은 최재석을 왕따 시켰다

유사학문과 학문의 차이는 학문적 토론의 여부이다. 유사학문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한다.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과 재야유사사학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최재석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다. 최재석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하는 강단을 사기꾼이나 쓰레기나 유사학자라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내가 그들의 학문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면 의당 (나의 비판이 타당한지 부당한지) 대답이 있어야 할 텐데도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2010)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병도(1989년 작고), 이기백(2004년 작고), 김철준(1989년 작고) 교수는 나의 비판에 응답하지 않고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내 나이 이기동 교수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니 내 사후가 아니라 생존 시에 나의 비판에 답..

역사 2024.07.18

강단유사사학과 일제 육군 참모본부의 교시

강단유사사학과 일제 육군 참모본부의 교시최재석은 일본인 학자들의 수미불일치를 ‘서두의 위장법’이라 명명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의 스승을 좇아 항상 서두의 위장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하고, 『삼국사』를 신뢰하고, 동북공정에 반대한다고 항상 서두에서만 말하고, 본론과 결론은 『삼국사』를 불신하고 야마토임나설과 동북공정을 추종한다. 전술하였듯이 일본육군 참모본부는 1870년부터 역사 날조를 시작하였다. 참모본부는 야마토임나설에 관해서는 『황조병사』(1880년)와 『임나고』(1882년)를,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관하여는 1884년 「동부여영락대왕비명해」와 「고구려고비고」를 제작하였다. 일제는 야마토임나설을 날조하고,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자를 변조하거나 지워서 야마토임나설의 장해물을 제거하였다. ..

역사 2024.07.15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는가?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는가? 일제유사사학의 야마토임나설(임나일본부설) 쓰에마스의 「임나흥망사」(1949)는 일제유사사학의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야마토왜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임나=가야를 직접 지배했다는 것으로 연민수는 쓰에마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末松說에 따르면, 백제는 367년 처음으로 일본에 遣使하여 국교를 열고 백제의 요청에 따라 己巳년(369년)에 일본이 대규모 출병을 단행하여 이를 계기로 이전부터 진행중이던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나아가 김해의 임나가라를 중심으로 한 가야제국을 직접 지배 하에 두고 그 외곽에 있던 백제와 신라를 부용화시켜 간접지배 하에 두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이제국을 총칭하는 이른바 임나의 성립을 보게 ..

역사 2024.07.15

임나=가야는 야마토왜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였다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본서기」를 날조 해석하여, 야마토왜가 가야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서기」 249년(신공49년) 이야기를, 249년을 369년으로 바꾸고, 일본을 백제로,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고 변조하고, 정복을 상호선린우호관계로 날조한 후, 다음의 「일본서기」 262년 기사를 날조하여 382년 가야가 백제의 실질적 지배 하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62년에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역사 2024.07.15

경남매일 2024.7.9. 유우창의 "광기에 휩싸인 '역사 장사치'들”에 대한 반론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44372 광기에 휩싸인 '역사 장사치'들 - 경남매일지난 6월 18일 화요일 오전, 이른바 \'애국시민\' 몇 사람이 김해시사 발간을 방해하기 위해 김해시청에 모여 \'성명서\'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김해시는 식민사관으로 왜곡하여 \'...www.gnmaeil.com​​유우창은 김해시사 제2권 가야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역사 장사치들의 김해시사 발간 방해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의 모든 글이 그러하듯이 유우창의 글은 근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이덕일이 분국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서 가야사를 잘 알지 못하며, 이덕일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는 ..

역사 2024.07.13

백제, 임나=가야, 신라가 야마토왜와의 교역권을 위해 경쟁하였다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근초고왕 시 백제와 신라. 양국은 야마토왜와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나 백제측의 우세로 끝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술하였듯이 열도에는 가야가 먼저 진출하였다. 3세기 말부터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였으므로 열도의 지배와 관련하여선 백제와 가야의 대립이 처음에는 있었을 수 있지만 신라와 백제의 대립은 있을 수 없다. 신라가 열도와 교역하려 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신라는 백제의 열도 정벌 시 백제에 협력하려는 방안까지 고려하였다. 가야가 먼저 열도에 진출한 후 백제가 관할하지 않았던 한반도와 열도의 교역을 하였겠지만, 백제의 열도 진출 후엔 열도의 무역도 백제의 관할이 되므로 가야의 무역이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면서, 열..

역사 2024.07.12

464년 「일본서기」의 일본이 고구려마을과 싸운 이야기

「일본서기」 464년 2월 이야기는 신라마을이 고구려마을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신라마을이 신라마을에 있던 고구려인들을 죽이자 고구려마을이 침략하였고, 신라마을이 임나의 일본부에 구원을 청하자, 일본이 고구려마을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천황이 즉위하고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新羅國)이 속이고 배반하며 포저(苞苴)를 바치지 않은 지가 지금에 이르러 8년째였다. 그러나 중국(中國)의 의도를 매우 두려워해서 고구려와 화의를 닦았다. 이로 인해 고구려 왕이 정예병사 1백 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 군사 한 사람이 잠시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신라인을 전마(典馬)로 삼았다[典馬는 우마카히(于麻柯比)라고 읽는다.]. 그가 돌아보며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

역사 2024.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