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는가?
일제유사사학의 야마토임나설(임나일본부설)
쓰에마스의 「임나흥망사」(1949)는 일제유사사학의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야마토왜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임나=가야를 직접 지배했다는 것으로 연민수는 쓰에마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末松說에 따르면, 백제는 367년 처음으로 일본에 遣使하여 국교를 열고 백제의 요청에 따라 己巳년(369년)에 일본이 대규모 출병을 단행하여 이를 계기로 이전부터 진행중이던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나아가 김해의 임나가라를 중심으로 한 가야제국을 직접 지배 하에 두고 그 외곽에 있던 백제와 신라를 부용화시켜 간접지배 하에 두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이제국을 총칭하는 이른바 임나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말송설에서 말하는 임나의 성립이란 일본의 가야제국에 대한 일괄지배체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임나에 대한 지배는 大和朝廷의 국내적 지배형태인 屯倉(미야케) 형식으로 본다. 미야케란 대화조정 직할령에 대한 도시, 경작자, 곡물을 포함하는 지배 형태를 가리킨다. 즉 임나의 지배를 大和조정의 국내지배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다. 또한 임나 지역에는 大和조정에서 파견된 지배자가 놓여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김태식은 쓰에마스의 날조가 외형적 근거를 갖춘 야마토임나설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에마스의 견해를 요약하고 있다.
「일본서기」로 보아, 신공황후 섭정 49년인 서기 369년에 왜군은 바다를 건너 신라를 쳐서 比自㶱(창녕), 南加羅(김해), 㖨國(경산), 安羅(함안), 多羅(합천), 卓淳(대구),加羅(고령) 등 일곱 나라를 평정함으로써 임나 지배를 시작했으며, 또한 왜군은 전라도 지역을 평정하여 일부를 백제 근초고왕에게 줌으로써 조공의 서약을 받아냈다고 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왜가 신묘년, 즉 서기 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 등을 깨뜨려 臣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서기 400년을 전후하여 이들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에게 상당히 격파되기도 하지만, 그 지배체제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했고, 오히려 왜군은 그 얼마 후 황해도 연안까지 북상하여 한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25사의 하나인 『宋書』에 보이듯이, 5세기에 왜왕은 중국 남조에 조공하여 ‘使持節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아냈으니, 이는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 백제가 점차 남쪽 지역에 대해 팽창해옴에 따라 왜는 임나 지역의 일부를 백제에게 할양해 주기도 했고, 신라의 무력 진출에 의해 남가라·탁순 등의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다. 임나의 지배기관인 임나일본부가 이를 막지 못하여 임나는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임나의 일본 관가는 562년 신라 진흥왕이 보낸 군대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는 것이다.
결국 왜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 동안 가야 지역에 해외 통치 기관인 임나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이는 기존의 전통에 비하여 임나 지배 기간을 대폭 줄여서 본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의 유사 야마토임나설
강단유사사학은 임나일본부의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을 안라국으로 축소하고, 그 성격을 외교기관으로 보므로 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한다. 연민수는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국내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것은 이병도였다. 그에 따르면 소위 임나부라고 하는 것은 본래 왜국이 가야제국과의 무역관계를 위하여 마치 조선시대 왜관과 같은 상관으로 설치하였던 것인데, 가야제국이 신라세력의 압력에 못 이겨 왜인의 무력원조를 구했기 때문에 임나부가 그 역할의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사료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천관우의 기본 시점을 계승한 김현구의 백제지배기관설부터다. 이 설은 흠명기의 임나 관련 사료가 백제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데 착안하여 백제가 가야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을 임나일본부라고 본 것이다. 이 설은 일본부의 반백제적 성격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일정한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이루어낸 선구적 업적으로 그 연구사적 의의는 크다. 이에 자극받아 任那日本府에 관한 몇 개의 專論이 나왔다. 필자는 日本府官人의 출자 분석을 통해 그 중 핵심멤버가 己汶國 출신의 가야인이고 西日本豪族, 왜계 가야인을 포함하는 일단의 세력이 6세기 30년대 이후 안라국에서 안라의 지배층과 함께 가야제국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주변 제국을 왕래하며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임나일본부의 실태라고 추정하였다. 李永植은 일본부의 구성분자 중에 的臣, 吉備臣, 河內直이 일본에서 각각 임나와 안라로 파견된 후, 귀국하지 않고 장기체재하면서 가야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吉備臣과 河內直 등 가야계 도래인이었다고 추정한다. 이들 일본부를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가야의 旱岐인 阿賢移那斯, 佐魯麻都였고, 가야제국은 이 일본부를 왜국으로부터의 구원을 얻는 창구로 활용했다고 본다. 김태식은 백제가 534년 직후에 왜계관료인 印支彌를 파견하여 설치한 대왜무역중계소인 안라왜신관을 임나일본부의 성립으로 보고, 540년대 이후 안라가 이 왜신관을 장악하여 가야연맹과 왜 사이의 외교교역기관으로 변경시키면서 안라의 독립보장을 위해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 연구는 그동안 일본이나 백제 측의 시각에서 생각해 왔던 임나일본부에 대해 가야제국의 입장을 강조하면서 그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한 점, 그리고 임나일본부 관인의 출자를 분명히 하고 가야제국의 독립보존 및 유지라는 성격을 공통적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 단계 진전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일제유사사학과 강단유사사학의 유사성
둘 모두 야마토왜가 열도를 장악한 고대국가라고 간주하여 열도를 우리 상고사의 강역에서 제외한다. 전술하였듯이 야마토왜는 실체가 없는 정치체다. 둘 모두 「일본서기」의 일본이 백제의 담로나 백제 관료인 왜왕임을 숨기기 위해 일본을 야마토왜로 날조하고 있다. 둘 모두 낙랑군을 보정시에서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 중국 동부와 북부의 우리 역사강역을 제외하고 있다. 둘 모두 BCE 24세기의 고조선을 부인하고, 『삼국사』의 사료가치를 불신하면서 한반도 남부는 소국들이 우글거리는 원삼국 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가 성립되며, 가야는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의 여러 소국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여러 마을국가의 명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 소국의 명칭이라고 날조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이 임나일본부의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을 안라국으로 축소하고, 그 성격을 외교기관으로 보므로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하나, 그들도 백제 신라 가야가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야마토왜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며, 일본 즉 열도백제가 열도의 마을국가를 통제하는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한반도 남부의 이야기로 보므로, 일제의 야마토임나설과의 차이는 극히 사소하다.
방법론적으로도 둘 모두 「일본서기」의 임나는 557년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가 될 수 없음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가야라고 우기며, 「일본서기」 249년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 우기며, 「일본서기」 임나는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문언을 무시하는 등 일제가 교시한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일본서기」를 철저히 무시한다. 둘 모두 유일한 근거는 음상사인데, 이마저도 가짜 음상사이며, 열도에 있는 진짜 음상사 지명은 모두 무시한다. 둘 모두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마을국가에나 적합한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철면피를 쓰고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에 적용시키는 코미디로 일관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한국사의 고대사 연표를 작성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의 청출어람은 「일본서기」 무시에서 두드러진다. 그들은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날조하면서, 전쟁과 정벌을 동맹과 통교라 하고, 「일본서기」 464년 2월 이야기와 관련하여선 구원군을 침략군이라 하고, 문언에 없는 고령의 야마토왜 군사기지를 창조하는 등 언어의 연금술사적 능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낙동강이 바다이므로 가야가 임나라는 놀라운 역사지리학의 업적을 선보이며, 임나4현과 관련하여선 놀라운 고생물학과 고인류학의 성과를 내놓기도 한다.
일제유사사학의 핵심적 날조인 야마토왜 실재설과 「일본서기」의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라는 억지에 동의하면서, 임나일본부의 성격이나 범위에 관해 말장난하는 것이 일제유사사학과의 대단한 차별점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며 대중을 속이고 일제유사사학의 날조를 퍼뜨리는 것은 그들이 일제유사사학의 주구임에 불과하다는 명확한 증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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