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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가 폭파되지 않은 이유

일제 참모본부의 한문해독능력이 유치원생 수준이어서 광개토대왕릉비는 폭파되지 않았다. 그들의 문장독해능력이 초등학생 수준만 되었더라도 광개토대왕릉비는 사라졌을 것이다.​일제·중제·강단유사사학의 도해파 주장의 모순성이들 유사사학은 도해파를 날조로 보지 않고, “倭가 신묘년에 (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쳐서 臣民으로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도해파를 인정하면 광개토대왕릉 비문은 문장이 되지 않는다. 즉 이들은 말도 되지 않는 문장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첫째, 이들 유사사학의 주장은 고구려 천하관에 배치된다. 속민이나 신민을 거느릴 수 있는 주체는 고구려밖에 없다. 왜가 다른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표시하는 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에 배치되므로, 고구려의 강성함과 광개토대왕의 업..

역사 2024.05.19

백제 한씨 미녀와 고구려 안장왕은 어디에서 만났는가?

강단사기꾼들은 경기도 어딘가에서 만났다고 사기친다. 그러나 이 둘의 만남은 요동반도에서 있었다.​신당 전쟁은 요동반도 요하 태자하 선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단사기꾼들은 임진강 부근에서 싸웠다고 하면서 신라의 국경은 대동강이라고 한다. 요동반도의 지명과 음상사 지명을 찾은 것이 임진강 부근인데, 일제의 교시는 신라 국경이 대동강이라고 하여 두 사실에 모순이 발생한다. 물론 사기꾼들은 거짓말로 이 모순을 숨기고 있다. [임진강과 대동강 사이가 무주지였다가 735년 당나라가 거저 신라에게 주었다고 사기 친다. 그러나 675년부터 735년까지 이 평야 지역이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사기꾼들은 신라가 점점 북상해서 대동강까지를 점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

역사 2024.05.18

백제도 근초고왕 시 낙랑군을 영토화했다

246년 이후 백제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낙랑은 당연히 낙랑군 본군이다. 韓 지역 즉 백제는 낙랑군 동남쪽이다. 286년 책계왕이 대방왕과 혼인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항한 것은 황하 항해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304년 분서왕이 낙랑 서쪽 현을 취하였다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삼국사』 편찬자들이 온조왕의 낙랑군 동부도위에 대한 언급을 본군으로 착각하고 낙랑 동쪽 현을 취하였다는 기사를 낙랑 서쪽 현을 취하였다고 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이왕과 분서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것은 황하 항해의 안전을 위해 황하 서쪽인 낙랑군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진 말 ‘흉노’ 선비 등 중국 북부의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남하하여 중국 북부를 통치하는 소위 북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그 혼란기를 ..

역사 2024.05.17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광서성) 출신

흑치상지 묘지명에 ‘그 조상은 부여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자강 하류 이남의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빈랑(檳榔)이라는 나무 열매를 항상 씹어 이가 검게 된다고 한다. 『삼국사』, 『구당서』, 『신당서』 모두 “黑齒常之 百濟西部人(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인이다)”이라 하는데, 『구당서』와 『신당서』는 월주가 백제의 서부 지역이라고 한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월주는 전술하였듯이 진평을 의미한다.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도 흑치상지의 출신지인 백제 서부가 지금의 광동성 흠현 서북이라고 하는데, 흠현이 광서성 남령시(南寧市) 동남쪽이므로 흠현 서북은 백제향 즉 진평이다. 진평=흑치는 백제의 동남아 무역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백제가..

역사 2024.05.17

백제의 진평은 광서성

『송서』, 『양서』, 『양직공도』, 『남사』, 『통전』의 진평과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 서부 지역인 월주는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이다. 『송서』에 의하면, 광주(廣州) 울림군(鬱林郡)에 진평현이 있었으며, 『中國地圖集』(1995년판)에는 宋나라가 설치했던 진평현 경내에 지금까지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살아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도 장족자치구의 현지인들은 백제향의 중심지인 백제허를 대백제(大百濟)라고 읽으며, 전라도에서 사용되었던 외다리방아와 맷돌을 사용하고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도 진평현이 광서성에 있다고 한다. 진평이 북조의 사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진평이 중국 남쪽 즉 남조 영역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2024.05.17

백제 첫 수도인 비류의 위례성은 두번째 수도인 온조 위례성의 동북쪽

BCE 2년에 낙랑군 동부도위가 불태운 위례성은 한수 동북쪽의 주민을 징발하여 수리한 것으로 보아 비류의 첫 위례성이고, 이로부터 미추홀이 낙랑 동부도위와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비류의 위례성이 온조의 위례성 동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이 인천을 비류, 온조를 서울이라 하여 한반도에 비정하는 것은 두 위례성의 위치관계 확인만으로도 날조임이 드러난다.

역사 2024.05.17

백제의 시조는 소서노이고 첫 도읍지는 미추홀이다

온조 시조설에 의하면 BCE 5년의 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온조 시조설에서 기술하는 도읍지는 한산 부근 한수 남쪽이다. 그런데 온조가 천도한 도읍지도 한산 부근 한수 남쪽이다. 따라서 비류 시조설의 미추홀이 첫 도읍지(위례성)이고 온조의 한수 남쪽 위례성은 두 번째 도읍지(위례성)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소서노로 추정되는 국모가 죽은 후에 온조가 한수 남쪽으로 천도하기로 한다는 것은, 소서노의 죽음 당시 소서노 비류 온조 모두 미추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비류는 소서노의 결정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소서노가 죽자 온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 BCE 6년 소서노 사망 이전 백제 기록은 소서노왕 시의 일이다.

역사 2024.05.16

대마도가 국제법상 우리 영토인 이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여러 증거가 많지만 국제법적으로 가장 확실한 증거는 김상훈 선생이 발견하였다. 김상훈 선생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https://www.vanchosun.com/news/main/frame.php?main=1&boardId=17&bdId=44463&cpage1=587  일본의 개항 직후 미국은 일본 본토에서 1000여km쯤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오가사와라'를 발견했다. 이를 미국령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일 간 영토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일본은 그 섬이 나와있는 자국의 지도(1785년)를 제시했다. 지도 작성자는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로, 일본의 영토 주권에 가장 먼저 눈떴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상방위를 튼튼히 하고 주위의 무인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야 한다'고 ..

역사 2024.05.14

고구려는 북경 平谷區(당시 요동군)에서 건국

광개토대왕릉비는 건국 도읍지를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라고 기술한다. 이 문구를 “비류곡 홀본 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러한 의미가 되기 위해선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이 아니라 ‘城於沸流谷忽本西山上’이 되어야 하므로 옳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구려가 漢의 부용 세력으로서 漢의 영토인 요동군 내에서 건국하여, 원천적으로 성을 쌓을 수 없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문자 그대로의 올바른 해석은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 위에 의거하여 도읍을 세웠다” 이다.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 순천부총도(順天府總圖)에 성산(城山)이 구수(泃水) 서쪽에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비류수는 구하이고, 비류곡 즉 홀본은 금해호(金海湖) 서쪽 구하 유역(지..

역사 2024.05.13

낭야는 어디에 있었는가?

중제유사사학과 강단유사사학은 제장성 북쪽이 제나라이고, 남쪽이 초나라라고 사기친다.제장성 북쪽이 번조선의 영토였음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낭야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확인하면 그들의 사기를 바로 알 수 있다. ​영정(진시황)은 남으로 낭야산에 가서 경치가 좋아 석 달을 머물렀다. 낭야대에 대해 『사기집해』는 월왕 구천이 낭야대관을 세웠다 하고, 『사기정의』도 『괄지지』와 『오월춘추』를 인용하여 월왕 구천이 도읍을 낭야로 옮기고 관대를 세워 동해를 바라보았다고 하며, 『사기색은』은 『산해경』을 인용하여 낭야대는 발해 사이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발해와 동해는 모두 대야택을 의미한다. 제나라의 남부에 낭야산이 있어야 월이 강성해졌을 때 낭야와 그 주변을 차지하여 낭야를 수도로 정할 수 있다. 영정이 태산에서 봉..

역사 2024.05.12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

외교는 힘을 가진 주체 사이의 교섭이다. 아무런 힘이 없을 경우 외교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윤봉길 의거 후 적극적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 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은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장개석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를 공동성명에서 채택하도록 한 것이었다. 장개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독립의 구걸이 아닌 윤봉길의 투쟁과 다수의 한국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힘이었다. ​장개석은 일제와의 전쟁에서 한국 독립운동세력의 무장력이 중국에 이로울 것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강토가 없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력투쟁으로 외교적 성과를 가져왔고, 독립을 쟁취했다. 무력 투쟁이 가장 효과적인 외교수..

역사 2024.05.05

조선총독부 기관지 역사비평사의 논문심사 거부

조성훈 선생님 투고논문에 대한 ‘부적합’ 판정과 반려 결정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는 조성훈 선생님이 2024년 3월 8일 『역사비평』에 투고하신 논문 「낙랑군은 보정시에 설치되었고 4세기 전반 고구려는 중국 영토를 탈취할 수 없었다」에 대해 간행규정(논문투고규정)에 따라 1차 심사를 진행하여 ‘부적합’ 판정을 내렸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여러 차례 『역사비평』에 논문을 투고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심사 결과 모두 ‘게재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모든 심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역사비평』 및 심사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역사비평』에 논문을 투고하는 목적이 논문 게재 그 자체가 아니라, 심사서 공개 및 비난을 통해 『역사비평』을 공격하기 위함이라..

역사 2024.04.26

단군은 壇君이다

삼국유사는 단군을 제단 단(壇)자, 壇君으로 표기한다.제왕운기는 단군을 박달나무 단(檀)자, 檀君으로 표기한다.​신단수도 삼국유사는 神壇樹로 표기하고, 제왕운기는 神檀樹로 쓴다.​고조선 이전은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고조선도 단군의 명칭으로 보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제단 위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이 임금이다. 따라서 檀君이 아닌 壇君이 타당하다. ​------학자이자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저서 ‘조선상고사’는 시종일관 제단 단(壇)자 ‘壇’君으로 기재하고 있다. 김용섭 교수도 ‘농업으로 보는 한국통사’에서 ‘壇’君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1920년대에 발행되던 동아일보 역시, 壇君으로 표기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 선생도 당시 동아일보 기고문..

역사 2024.04.08

왕검성은 낙랑군이 되었는가?

주석을 보시려면 첨부된 화일을 보셔야 합니다. 1. 서 『사기』와 『한서』에 의하면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는 다르다. 『한서』 「지리지」의 주석자들은 왕검성에 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즉 예맥조선이 망한 후 왕검성은 요동군 검독현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합리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그냥 우긴다. 최초로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이가 서영수이다. 그러나 서영수의 글엔 전혀 논리가 없어, 그의 글은 그냥 우기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본고는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가 명백히 다름을 논증하고, 서영수 글의 유사사학성을 제시한다. 낙랑군 평양설이 왕검성 낙랑군설에 근거하고 있어, 왕검성 낙랑군설이 무너지면 낙랑군 평양설도 당연히 근거를..

역사 2024.03.14

유사학술지 역사비평에 낙랑군 논문 제출

https://taxecolaw.tistory.com/265 낙랑군은 처음부터 보정시에 있었고 313년에 이동한 적도 없다 (이정빈에 대한 반론) 1. 서 본고는 이정빈의 논문에 대한 반론이다. 이정빈은 낙랑군이 4세기 전반 대동강 유역에서 요서 지역으로 교치되었고, 5세기 전반 요서 지역에서 난하 유역으로 교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 taxecolaw.tistory.com 유사학술지 역사비평에 위 논문을 제출하였습니다. ​ 물론 그들이 게재하리라 생각은 않지만 게재 거부 과정에서 나타날 그들의 조선총독부 기관지성을 드러내기 위해 투고하였습니다. ​ 향후 그들의 심사문 등을 계속하여 올리겠습니다.

역사 2024.03.08

유사학술지 역사비평사의 이의신청에 대한 답변

예상대로 역사비평이 유사학술지로서 매국노의 주구라는 것을 자인하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 여러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강단유사사학을 끝까지 옹호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 개소리의 백미는 ​ "‘발해’의 문제는 단순히 단어가 빠져있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며, 투고자의 사료 이용 방법의 자의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 이 개소리는 이의신청 답변자가 멍꿀상태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술지의 편집 관련 사람이 멍꿀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의 지적 수준을 나타냅니다. ​ 사기 하본기에 대한 주석에서 인용한 괄지지 문구는 "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 皆邑落有人居, 屬百濟" 이고 ​ 사기 오제본기에 대한 주석에서 인용한 괄지지 문구와 한원이 인용한 괄지지 문구는 "百濟國西南海中有大島十五所, 皆..

역사 2024.03.07

"한국어 문법에 의한 톨카피얌 해독의 가능성 검토" 등재학술지에 게재 확정됨 (고대 타밀인은 한국인이다)

지금까지 톨카피얌은 해독되지 않고 있는데 우리말로 보아야 해독됩니다. 공지에서 알려 드렸듯이 제가 톨카피얌을 세계 최초로 해독한 책을 냈습니다. 물론 기존의 해독자들은 자기들이 해독했다고 주장하지만, 각 단어의 뜻과 문장에서의 역할을 밝히지 못하고, 단어의 뜻으로 내용을 추정한 것이므로 해독이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각 단어의 뜻과 문법적 역할을 최초로 밝혔으므로 저의 작업이 최초의 해독입니다. 물론 각 단어의 뜻은 기존 연구결과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제 해독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고대 타밀어 서적을 한국어 문법에 의해 다시 해독하여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위 논문은 타밀인의 문법 문학서인 톨카피얌이 우리말로 읽어야 해독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제 톨..

역사 2024.02.24

고구려 수도의 변동

1. 서 고구려 수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삼국사』는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의 근처로 옮겨갔다고 기술한다. 이는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은 역사가 아님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북경 동북쪽에서 건국한 고구려가 현도군을 정복한 14년부터 멸망 시까지 북경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 멸망 시의 수도는 요양이다. 국내성은 현재의 집안에서 머나먼 서쪽의 천안시이고 한성은 현재의 평양이다. 국내성이 집안이고, 고구려 평양이 현 평양이라는 것은 개솔이며, 국내성과 현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인 적이 없다. 먼저 고구려의 실제 수도를 살피고, 강단유사사학 주장의 억지성을 살핀다. 2. 고구려 수도의 변동 1) 고구려의 건국지: BCE 37년, 홀본 = 북..

역사 2024.02.04

유사학술지 역사비평사에 이의신청서 제출

일제 잔재 선전지인 역사비평이 이의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확실합니다만 이의신청을 통한 그들의 답변에서 그들이 유사학술지임을 자백하게 될 것이므로 이의신청을 하였습니다. ​ --------------------- 저는 역사비평사가 일제 간첩들을 위한 학술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의신청 업무를 담당하시는 분도 해방 후 이승만이 매국노들의 앞잡이가 되어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일제 잔재들을 추종한 사람만이 역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저의 글에 대한 심사자는 일제 잔재들입니다. 일제 잔재 논의를 떠나서도 기존의 견해와 다르다고 하여 무조건 게재를 거부하는 것도 학술지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제 견해가 말이 안 된다면 다른 반박문을 통해서 저를 망신 주면 될 것입니다. 심..

역사 2024.02.03

역사비평사 사기꾼들의 심사문(게재거부) 공개('요동반도 백제와 대동강 원산만 선의 허구성'에 대한 심사문임)

2024년 1월 초에 투고한 다음 글에 대한 그들의 심사문입니다. https://taxecolaw.tistory.com/258 요동반도 백제와 대동강 원산만 선의 허구성 이 글은 역사비평사에 투고된 글입니다. 한글에서 복붙했더니 주는 다 지워졌습니다. 역사비평사는 이 글을 거부할 것입니다. 거부하면서 나타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기성을 드러내기 위해 taxecolaw.tistory.com ​ 게재거부통지에 대해 반론하겠습니다. 심사자 1 ㅇ 󰡔사기정의󰡕 하본기 주석 이외에 󰡔사기󰡕권1 「오제본기」의 주석과 󰡔한원󰡕에서 인용된 괄지지에는 ‘발해’라는 단어가 빠져 있으므로 요동반도가 백제 영토였다는 것은 면밀한 검토를 요한다. ㅇ 반론: 괄지지의 ‘발해’라는 문구가 없어도 요동반도 백제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역사 2024.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