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향토유사(사이비)사학까지 동원하는 강단유사(사이비)사학

역사회복 2024. 10. 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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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장가 강수가 석탈해 후손? 논리 빈약한 억지 주장

신라 태종무열왕이 문장가 강수에게 성명을 묻자 강수는 "신은 본래 임나가량 사람으로 이름이 우두입니다"라고 답변한다. 매림역사TV 운영자 이완영은 (2022)이란 논문에서 강수가 석탈해(신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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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사이비들이 더 이상 총독부 소설을 전파하는 데 부담을 느꼈는지 향토사이비를 동원하기까지 한다.

 

이형우는 이완영을 공격한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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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가 말한 임나가량이 다파나국이라는 이완영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이완영은 강수의 성을 석씨로 변개해 임나의 위치를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동시켰다. 강수는 열전에 석강수로 표기되지 않았다. 강수가 석씨라면 무열왕이 강수를 '임생'이 아니라 '석생'이라 불렀을 것이다. 태종무열왕은 강수가 '임나가량' 사람이라 '임생(任生)'이라고 부른 것이다. 석체는 두 번 석체로 표기되므로 석은 성씨가 아니다. 1994년 6회 갑술보 <월성석씨선원대동보>에 처음으로 석체와 강수가 들어가는데, 새로 밝혀진 사실이 없는 상태에서 추가된 것이므로 석체와 강수가 석씨임을 믿을 수 없다.

이완영이 다파라국의 위치를 찾을 때 인용한 <태백일사>에 20세기 청나라 때 지명인 해성(海城)이 나오므로 태백일사는 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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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필자는 임나가량이 다파나국이라는 이완영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삼국사』에 탈해는 다파나국 출신인데 다파나국은 왜국 동북 천리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왜국은 황하 어귀의 왜이고,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의 왜이다.

 

1. 강수는 석씨가 아니다. 그래서?????????????

이형우는 강수의 성이 석씨면 임나가 열도에 있고, 강수의 성이 석씨가 아니면 임나가 한반도 남부에 있는 듯이 말한다. 범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고도의 조선총독부 논리를 답습한 이형우가 자랑스럽다. 우리 한국은 이형우처럼 고도의 논리력을 지닌 사이비들이 향토에까지 있는 나라인 것이었던 것이었다.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本은 선조(근본)를 의미하며, 任那加良의 加良은 음을 가라로 볼 수 있는데, 가라는 구루=城=마을=국가의 뜻이다. 따라서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마을국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이 문구를 “신은 본래 임나가야 사람입니다”라고 해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강수가 말한 임나가량이 가야의 고령이나 김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강수의 부 석체는 신라의 관직인 나마를 지냈다. 강수는 신문왕(재위 681-692년) 때 사망하므로 강수의 나이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강수는 가야가 멸망한 지 한참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강수는 654년 무열왕 즉위 시 하급관리로서-왕이 강수와 만난 것이 늦었다고 한탄했음- 외교문서를 해독했다고 하므로 강수의 생년은 630년 경으로 볼 수 있다.) 고령이나 김해 사람들이 충주로 이주된 것은 6세기 중엽이다. 강수의 선조가 고령이나 김해 출신이더라도, 이주 후 7, 80년이나 지난 후에 태어난 강수가 자신을 본래 고령이나 김해 사람이라고 할 리는 없다. 만약 강수가 말한 뜻이 강단유사사학이 말한 뜻이라면 강수는 반역죄로 처벌될 수도 있다. 가야가 망한 후 한참 후에 가야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으며, 그 아버지가 신라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 신라 왕에게 자신을 망한 가야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本은 선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本을 선조를 의미하는 글자로 해석하더라도 임나는 고령이나 김해가 될 수 없다. 강수의 선조가 고령이나 김해 출신이더라도, 왕에게 가야가 존재할 당시의 지명을 들먹이는 것은 신라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줄 수 있으므로, 강수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고령이나 김해의 신라지명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나가 신라나 신라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강수는 그 선조가 임나국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강수 아버지의 이름이 석체(昔諦)이고, 따라서 강수의 성이 昔이라면 강수의 선조는 신라에서 열도로 건너갔던 신라의 석씨 집단이 나중에 다시 신라로 되돌아온 경우로 보인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열도로의 이동이 주가 되었지만, 진경대사와 강수의 사례로부터 열도에서 한반도로의 이동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체나 강수의 성이 석씨가 아니어도 임나국이 열도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강단유사사학이 本을 본래라고 사기 치는 이유는 本을 선조라 하면 강수의 선대가 고령이나 김해에서 충주로 이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고령이나 김해가 임나라는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충주로 이주된 고령이나 김해 출신의 사람들의 선조의 고향이 모두 고령이나 김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도 임나가 고령이나 김해를 의미할 수는 없다. 그들이 강수의 선대가 고령이나 김해로부터 이주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나가량이 고령이나 김해이므로 임나가 가야라는 동어반복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임나가 가야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오역도 서슴치 않거나 동어반복을 무슨 대단한 증거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 무열왕은 강수가 '임나가량' 사람이라 '임생(任生)'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무열왕이 강수를 임생이라 불렀기 때문에 임나가량이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가?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강수는 임나가량이 열도에 있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무열왕에게 선조가 임나국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생(任生)은 무열왕이 외교문서에 관한 것은 마음 놓고 맡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강단사이비들은 증거가 없으니 가짜 증거를 증거라고 우긴다. 그래서 우륵의 곡명이 임나의 지명이 되고, 위에서 보았듯이 동어반복을 증거라고 우긴다. 하기야 범인이 우주 최강의 논리인 동어반복으로 무장한 그들의 위대한 논리력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리오.

 

 

3. 석씨 족보를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위에서 말했듯이 강수의 성이 석씨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임나가량은 열도에 있었던 마을국가로 보아야 한다. 또한 강수와 석체를 연구한 결과 족보 작성자들이 이들을 석씨로 보아서 족보에 올렸다면 새로운 사실이 생긴 것이다.

 

이형우가 조선총독부는 전부 새로운 사실로 소설을 썼으므로 그것은 전부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형우가 속으로는 강단사이비들을 틀렸다고 해야 하는데, 사정상 이렇게 숨겨서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4. <태백일사>에 20세기 청나라 때 지명인 해성(海城)이 나오므로 태백일사는 위서이다.

 

우리는 오늘을 기뻐해야 한다. 이형우는 획기적인 위서 판별법을 창안하시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후대에 지명을 새로 만들면 그 지명이 있었던 과거의 사서는 위서가 되는 것이다. 우주 최강의 위서 판별자 이형우 선생을 격렬하게 존경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사기에 나오는 지명을 이형우 고향의 지명으로 하자. 그러면 사기는 위서가 되는 것이다.

 

 

경남도민일보가 그에게 기회를 주었음에도, 이형우는 임나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그의 평소 주장을 뒷받침하는 단 한 개의 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이완영이랑 싸웠어요.라고만 말한다. 그것은 그의 일기장에나 쓰면 될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형우는 거짓말을 안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임나가 한반도에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귀중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어도 거짓말을 부연 설명하는 또다른 거짓말은 하지 않고 있다. 그냥 이완영이 기분 나빠요라는 말만 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느낌이므로 최소한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