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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양광에게 현실 자각 타임 선사

양광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년 동안 전쟁준비를 한 후, 612년 11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당하를 건너 요동성 등 국경 부근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장안성(금주)으로 바로 보낸 수군도 패수(소릉하)에서 대패했고, 별동대 30만을 장안성에 보냈으나 보급 실패로 굶주려서 후퇴하다 살수(연태하)에서 거의 다 죽었다. 본고의 위치 비정은 당시의 양광 조서로 입증된다. 양광은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혼미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들면서 요(遼) 예(濊)의 경계를 자주 잠식하였다.”라고 하므로, 갈석산이 낭아산이고, 요수가 당하이고, 예가 황하 어귀 해안가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는 본고의 위치비정과 양광의 언급은 일치한다. 양광은 “발해를 덮어 우레와 같이 진동하고 부여..

역사 2024.06.06

양견의 허세와 굴복

양견(수문제)이 597년 “王은 遼水의 폭이 長江과 어떠하며, 高麗의 인구가 陳國과 어떠하다고 보는가?” 하면서 고구려를 위협하는 문서를 보내자, 고구려는 598년 濊 군사 일만으로 요서(당하 상류 남부)를 공격하였다. 濊병은 황하 하류 예인이나 예부여의 예인이다. 고구려의 공격에 영주총관 위충이 대응하자 후퇴하였다. 양견은 예상치 못한 고구려의 치고 빠지기에 당황하고 분노하여,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서둘러서 6월 양량과 왕세적을 장군으로 30만을 임유관을 통해 고구려로 보내고, 식량은 배로 황하로 보내려고 하였는데 강이식은 이를 눈치채고 보급선을 파괴하고 성을 지키면서 시간을 끌자 수의 병사들은 굶주려 병에 걸리는 상태가 되었다. 9월 수군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자, 고구려군은 임유관까지 추격하..

역사 2024.06.06

온달의 북주 침략 격퇴

북주가 우문옹(무제) 시 요동에 침입하였는데, 배산(拜山)의 벌판에서 온달의 활약으로 크게 이겼다. 위가 북제와 북주로 나뉘고 북주가 577년 북제를 멸한 후 고구려와 경계를 마주하여 북주가 침입하였다. 『태백일사』는 갈석산과 배찰산에 가서 토벌하고 유림관까지 추격했다고 하며, 유림은 산서성과의 경계라 한다. 배산의 벌판은 갈석산에서 남쪽으로 더 간 배찰산 부근, 보정시 남쪽의 벌판으로 추정된다. 유림관은 임유관의 다른 명칭으로 추정되며, 산서성과의 경계이므로 보정시 남쪽에서 서쪽으로 산서성으로 가는 도정의 태행산맥에 있는 관으로 추정된다. 북주나 수는, 상곡은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상곡과 거용관으로 나올 수 없고, 거용관에서 직선거리로 50km 남쪽의 임유관을 통해 요동으로 나와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침..

역사 2024.06.05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樂良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연가(延嘉)7년’을 539년으로 보는데,​[7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본고에서 479년의 연호는 영화임을 밝혔다. 59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599년에는 북제, 북주, 수대의 조각양식이 등장하고 있어(곽동석, 『한국의 금동불 1』, 다른세상, 2016. 56쪽)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539년은 안원왕 9년인데, 안원왕으로의 승계 시 혼란으로 인해 연호의 사용이 늦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불상광배 뒷면에 ‘高麗國樂良東寺’가 새겨져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樂良’을 지금의 평양이라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듯이 6세기에 濼浪이 樂良으로 변하여 쓰여졌다면, 덕흥리고분과 안악3호분(동수묘)에 의해 고구려에 유주 濼浪郡이 있었음이 입증되므로, ‘高麗國樂良’은 고구..

역사 2024.06.05

강단의 永和十三年 사기질 (사마담에게 고마운 이유)

동수묘 묵서명은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으로, 나이 69세에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강단 사기꾼들은 영화13년을 사마담(동진 목제)의 연호로서 357년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담은 영화란 연호를 356년까지 사용하였고 357년에는 승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1. 고구려가 당시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던 남조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

역사 2024.06.03

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주 치소 광계와 지금 치소 연국은 낙양에서 2300리이다)

덕흥리고분 묵서명에서 후연 유주의 치소였던 광계와 후연의 수도였던 용성이 낙양에서 2300리라 한다. 즉 광계와 연국은 현재의 보정시 부근이다.  고구려는 후연을 정복하고 후연 남부에는 북연을 설치하여 위와의 완충지대를 만들었고, 서진의 유주와 평주 즉 당하에서 영정하까지의 후연 영토엔 고구려의 유주를 설치하여 영토화 하였다. 고구려 멸망 시까지 동성왕에게 탈취당한 시간 이외에는 이 영토를 유지하였고, 문자명왕 시에는 백제의 韓 지역까지 정복하였다. 강단사기꾼들은 평주의 낙랑군이 지금 평양이라 하는데, 서진의 유주 남쪽이 서진의 평주이고 평주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었다. 즉 낙랑군과 대방군은 낙양에서 2300리를 넘지 못한다. 지금 평양과 황해도는 낙양에서 5천리가 넘는다. 그들이 교치했다고 주장하는 요..

역사 2024.06.02

安平樂未央과 長樂未央

강단유사사학은 단동에서 발굴된 기와에 ‘安平樂未央(평안함과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이라는 문구가 발견되기 때문에 단동을 서안평이라고 하면서, '서안평에서의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 이라는 의미라 주장한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gskh_007_0040_0010_0090_0020] 林起煥安平 註 001 樂未央 註 002 安平 註 001 樂未央 註 002db.history.go.kr​기와의 길상구를 지명으로 전환하는 유사사학자들의 천재성은 유사역사학계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강단유사사학은 여대(旅大)에서 출토된, ‘長樂未央’명 와당에선 여대를 장이라는 도시로 보지 않고, 長樂未央(늘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 전체를 길상구로 본..

역사 2024.06.01

후한의 고구려에 대한 조공 중단 후

후한의 조공 중단으로 전쟁 발생전술하였듯이 대무신왕과 유수는 1세기 전반 낙랑군을 두고 1승 1패를 하였고, 모본왕은 CE 49년부터 후한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후한이 중기에 접어들며 초기 시행했던 북방예산을 조달하지 못하자 후한에 대한 불만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漢의 조공이 중단되자 105년 침입하였다.고구려가 111년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에 속하기를 구했고, 침입하였다는 것은 漢이 조공을 재개하라 요구한 것이고, 漢이 거부하자 바로 현도를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이러한 전후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하나가 잘못이라 판단하였다. 조공을 받지 못한 오환선비는 121년의 공격처럼 고구려와 공동작전도 하였다. 고구려는 후한과 주로 현도군을 두고 싸웠다. 현도군이 가장 국경과 가까웠고, 요동군..

역사 2024.06.01

살수대첩의 살수는 연태하

552년 양원왕은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은 586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당서』는 평양성은 장안이라 불렸다고 하고, 『고기』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므로 김부식은 두 성이 동일한지 다르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장안성은 평양과는 다르다. 중국인들은 고구려가 줄곧 평양을 수도로 하여 고구려의 왕이 있으면 평양이라고 불렀다. 장안성은 지금의 금주인데, 고구려가 중국 동북부의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평양(요양)이 너무 멀어 금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집안-요양-금주로 수도가 계속 서쪽으로 이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안성이 지금의 금주임은 수나라의 2차 침공에서 알 수 있다. 수나라 군사는 611년 탁군에 모였다. 수군은..

역사 2024.05.31

비류백제=예부여의 역사

후한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예부여는 한나라 바로 옆에서 건국하였으므로 후한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예부여는 49년부터 후한에 조공하였다. 예부여는 111년 낙랑군을 공격한 후 바로 귀부하고, 167년 현도군을 공격한 후에도 174년 바로 귀부하는데, 이는 예부여의 위치상 漢에 귀부하지 않으면, 漢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 선비 등 다른 세력에 의해 바로 점령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漢이 소국인 예부여를 놓아 두었던 이유는 다른 세력들을 통제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석괴의 지배단석괴가 그 영토를 3부로 나누어서 그 중 동부가 우북평에서 요동까지인데, 부여와 예맥과 접한다. 여기서 부여는 예부여이고, 예맥은 고구려이다. 단석괴는 영토 내 호수에 물고기가 많아서, 이를 식량으로 활용하기..

역사 2024.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