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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유사사학이 토론을 거부하는 난하설의 소설성

재야유사사학이 토론을 거부하는 난하설의 소설성난하 갈석산설(창려 갈석산설)은 역사날조 총책 담기양이 제조한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다. 윤내현이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는 근거는 요수가 난하라는 것과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다. 윤내현은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라고 하나, 이는 요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실질상 윤내현은 난하가 요수라는 단 하나의 근거로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난하가 요수였던 적은 없다. 윤내현은 『여씨춘추』 「유시람」 고유 주석을 근거로 난하가 요수라 하나, 본고에서는 고유가 말하는 요수가 중역수임을 밝힌 바 있다. 무엇보다도 갈석산에 대해 주장하려면, 요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보다 갈석산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는 것이 ..

역사 2024.07.19

재야유사사학의 소양 부족

​ 재야유사사학도 강단유사사학처럼 토론을 거부한다. 정확히는, 재야유사사학은 학문적 소양이 부족하여 학문적 토론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학문적 능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주장을 방어하지 못하면 그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함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강단과 재야는 토론하지 않는다. 물론 강단은 거의 다 틀렸고, 재야는 강단보다는 덜 틀렸지만, 대중은 강단의 권위에 복종하므로 강단유사사학은 유지된다. 재야유사사학의 가장 큰 오류는 난하 갈석산설이다. 난하 갈석산설은 강단유사사학으로부터 삼한을 바닷속에 있게 하는 유사사학이라 공격을 받아왔다. 학문이 되려면, 난하설에 따르더라도 후삼한이 바닷속에 빠지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해야 하고, 반론을 못하면 난하설을 철회해야 한다. 그래..

역사 2024.07.19

유시민의 토착왜구성

소위 보수는 매국노를 계승하였으므로 그들이 토착왜구 행태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위 진보도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한다. 강단유사사학에 속하지 않는 진보 지식인이라면 강단유사사학 해체를 주장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 지식인들은 강단유사사학을 명시적으로 옹호하거나 강단유사사학에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음으로써 강단유사사학 생태계의 구성부분이 되고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유시민이다. 유시민은 박유하의 처벌을 반대하여 서명한 사람이다. 유시민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 그는 역사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모든 분야의 지식이 부족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하였다. 그의 역사책은 베스트셀러이다. 그가 쓴 역사책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 「나의 한국 현대사」, 「역사의 역사」,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

역사 2024.07.18

한국과 일본 사회 저질성의 원인

일본은 스스로를 뿌리 없는 민족이라 가르친다.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그들의 조상이고, 열국의 일원으로 우리 역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므로 그들은 조상을 찾을 수 없다. 조상이 없으면 즉 역사가 없으면 자기정체성이 있을 수 없다. 일제 전범들의 자기부정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전범들 즉 무식한 하급 무사들의 맹목적 국가주의가 현재 일본의 이념이다. 그래서 일본 사회는 저질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우리 역사 부정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한국 사회도 저질이다. 우리 조상은 중국 주변의 미개인들로서 중국의 문화로 개화되었고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으며, 남쪽은 야마토왜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인식한다. 홍익인간의 이..

역사 2024.07.18

강단유사사학은 최재석을 왕따 시켰다

유사학문과 학문의 차이는 학문적 토론의 여부이다. 유사학문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한다.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과 재야유사사학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최재석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다. 최재석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하는 강단을 사기꾼이나 쓰레기나 유사학자라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내가 그들의 학문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면 의당 (나의 비판이 타당한지 부당한지) 대답이 있어야 할 텐데도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2010)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병도(1989년 작고), 이기백(2004년 작고), 김철준(1989년 작고) 교수는 나의 비판에 응답하지 않고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내 나이 이기동 교수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니 내 사후가 아니라 생존 시에 나의 비판에 답..

역사 2024.07.18

강단유사사학과 일제 육군 참모본부의 교시

강단유사사학과 일제 육군 참모본부의 교시최재석은 일본인 학자들의 수미불일치를 ‘서두의 위장법’이라 명명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의 스승을 좇아 항상 서두의 위장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하고, 『삼국사』를 신뢰하고, 동북공정에 반대한다고 항상 서두에서만 말하고, 본론과 결론은 『삼국사』를 불신하고 야마토임나설과 동북공정을 추종한다. 전술하였듯이 일본육군 참모본부는 1870년부터 역사 날조를 시작하였다. 참모본부는 야마토임나설에 관해서는 『황조병사』(1880년)와 『임나고』(1882년)를,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관하여는 1884년 「동부여영락대왕비명해」와 「고구려고비고」를 제작하였다. 일제는 야마토임나설을 날조하고,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자를 변조하거나 지워서 야마토임나설의 장해물을 제거하였다. ..

역사 2024.07.15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는가?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는가? 일제유사사학의 야마토임나설(임나일본부설) 쓰에마스의 「임나흥망사」(1949)는 일제유사사학의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야마토왜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임나=가야를 직접 지배했다는 것으로 연민수는 쓰에마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末松說에 따르면, 백제는 367년 처음으로 일본에 遣使하여 국교를 열고 백제의 요청에 따라 己巳년(369년)에 일본이 대규모 출병을 단행하여 이를 계기로 이전부터 진행중이던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나아가 김해의 임나가라를 중심으로 한 가야제국을 직접 지배 하에 두고 그 외곽에 있던 백제와 신라를 부용화시켜 간접지배 하에 두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이제국을 총칭하는 이른바 임나의 성립을 보게 ..

역사 2024.07.15

임나=가야는 야마토왜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였다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본서기」를 날조 해석하여, 야마토왜가 가야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서기」 249년(신공49년) 이야기를, 249년을 369년으로 바꾸고, 일본을 백제로,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고 변조하고, 정복을 상호선린우호관계로 날조한 후, 다음의 「일본서기」 262년 기사를 날조하여 382년 가야가 백제의 실질적 지배 하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62년에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역사 2024.07.15

경남매일 2024.7.9. 유우창의 "광기에 휩싸인 '역사 장사치'들”에 대한 반론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44372 광기에 휩싸인 '역사 장사치'들 - 경남매일지난 6월 18일 화요일 오전, 이른바 \'애국시민\' 몇 사람이 김해시사 발간을 방해하기 위해 김해시청에 모여 \'성명서\'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김해시는 식민사관으로 왜곡하여 \'...www.gnmaeil.com​​유우창은 김해시사 제2권 가야편에 대한 문제 제기를 역사 장사치들의 김해시사 발간 방해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의 모든 글이 그러하듯이 유우창의 글은 근거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이덕일이 분국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서 가야사를 잘 알지 못하며, 이덕일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는 ..

역사 2024.07.13

백제, 임나=가야, 신라가 야마토왜와의 교역권을 위해 경쟁하였다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근초고왕 시 백제와 신라. 양국은 야마토왜와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나 백제측의 우세로 끝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술하였듯이 열도에는 가야가 먼저 진출하였다. 3세기 말부터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였으므로 열도의 지배와 관련하여선 백제와 가야의 대립이 처음에는 있었을 수 있지만 신라와 백제의 대립은 있을 수 없다. 신라가 열도와 교역하려 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신라는 백제의 열도 정벌 시 백제에 협력하려는 방안까지 고려하였다. 가야가 먼저 열도에 진출한 후 백제가 관할하지 않았던 한반도와 열도의 교역을 하였겠지만, 백제의 열도 진출 후엔 열도의 무역도 백제의 관할이 되므로 가야의 무역이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면서, 열..

역사 2024.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