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년 양원왕은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은 586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당서』는 평양성은 장안이라 불렸다고 하고, 『고기』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므로 김부식은 두 성이 동일한지 다르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장안성은 평양과는 다르다. 중국인들은 고구려가 줄곧 평양을 수도로 하여 고구려의 왕이 있으면 평양이라고 불렀다. 장안성은 지금의 금주인데, 고구려가 중국 동북부의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평양(요양)이 너무 멀어 금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집안-요양-금주로 수도가 계속 서쪽으로 이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안성이 지금의 금주임은 수나라의 2차 침공에서 알 수 있다. 수나라 군사는 611년 탁군에 모였다. 수군은 612년 1월 출발하면서 좌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의 길로 나가고, 우 12군은 점제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의 길로 나가기로 하였다. 隋군은 요동성을 비롯한 주변의 각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각 성들을 포위하고 남은 군사들을 평양 쪽으로 보냈다.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중문은 낙랑도로, 형원항은 요동도로, 설세웅은 옥저도로, 신세웅은 현도도로, 장근은 양평도로, 조효재는 갈석도로, 최홍승은 수성도로,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서 모두 9개군 30만이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수군이 가는 길 이름에 수성 증지 점제 함자 등등 낙랑군의 현 이름이 나오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이곳에 열거된 여러 방면의 길들은 당시 실재하는 것은 아니고, 과거의 낙랑 지역을 회복한다는 명분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수나라 병사들이 대단한 역사학자들이어서 수천리 떨어진 옛날 낙랑군의 현 이름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 길 이름을 그렇게 하였다는 무시무시한 상상력의 소유자들이다. 수나라와의 경계였던 고구려 영토에 이들 지명이 있다. 수군의 길 이름만으로도 낙랑군 한반도설은 끝장난다. 양광(수양제)의 조서가 아니라 고구려 왕의 조서에 나왔었다면 고구려 왕이 길이름을 날조했다고 주장했을 텐데, 양광의 조서니 그러지 못하고 수나라 병사들을 어마어마한 역사학자들로 만들어버리는 가공할 신공을 발휘한다. 신공왕후의 신공보다 한 수 위라고 하겠다.
수의 별동대 30만이 요동성에서 출발한 날은 6월 11일 이후이다. 양광은 전황에 진전이 없자 6월 11일 장수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였다. 그러자 장수들이 별동대라는 대책을 양광에게 건의했을 것이고, 양광이 이를 승인하는 과정을 거쳐 별동대 파견이 결정되었을 것이며, 별동대의 조직과 보급대책의 실행에도 시간이 필요하므로, 6월 11일 이후, 10일 정도 후에나 별동대가 출발하였을 것이다. 수가 퇴각하며 살수에 도착한 것은 7월 24일이다. 후퇴 시 살수에서 대패한 후 450리를 하루낮 하룻밤에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보병은 다 죽거나 도망가고, 기병만 살아남아서 후퇴했으므로 450리를 하루낮 하룻밤에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압록수인 난하에서 450리 떨어진 살수는 160km 거리의 연태하(煙台河)로 추정된다. 연태하는 화살처럼 강이 곧다. 당시 고구려의 요동성은 보정시 동쪽 창주시 북서쪽이다. 요동성에서 요양까지의 거리는 700km이다. 별동대의 출발일을 6월 20일경으로 본다면 30여일 정도에 950km[700km (요동성에서 요양까지) + 250km (요양에서 연태하까지)]를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 많은 강과 고구려군의 저항, 고구려 수도에서 대치한 시간, 대능하와 요하 유역은 여름에 진흙길로 변한다는 사실, 살수까지 퇴각 시의 속도 저하 등을 고려하면 장안이 요양일 수는 없다. 금주는 요동성에서 500km이므로 30여일 정도에 550km[500km (요동성에서 금주까지) + 50km (금주에서 연태하까지)]를 이동할 수 있어서, 장안을 금주라 가정하면 날자가 맞아떨어진다. 따라서 장안은 금주이고, 내호아의 해군이 도착한 패수는 지금의 소릉하(小凌河)로 볼 수 있다.
장안성을 요양으로 보고 요하를 압록수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요하는 요양에서 50km 떨어져 있으므로 살수에서 450리를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는 『삼국사』의 기록과 부합하지 않는다. 강단유사사학은 현재의 압록강과 평양을 고구려의 압록강과 평양으로 보는데, 지금의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임이 각자성석에 의해 증명되며, 수군 별동대가 불가능한 이동거리를 움직여야 하므로 논할 가치도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명백한 증거가 나와도 우긴다. 그들은 실증에 의해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자가 아니라 실증과는 무관하게 일제유사사학의 교시를 되풀이하는 앵무새이다.
영류왕이 당에 봉역도를 주고, 경관을 헐어버린 것으로 보아 영류왕은 장안성에서 요양으로 옮아가서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서워서 옮긴 것이므로 정식으로 천도한다는 말도 못하고 옮겼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망할 때의 수도는 평양(요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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