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후한의 고구려에 대한 조공 중단 후

역사회복 2024. 6. 1. 10:15

후한의 조공 중단으로 전쟁 발생

전술하였듯이 대무신왕과 유수는 1세기 전반 낙랑군을 두고 1승 1패를 하였고, 모본왕은 CE 49년부터 후한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후한이 중기에 접어들며 초기 시행했던 북방예산을 조달하지 못하자 후한에 대한 불만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漢의 조공이 중단되자 105년 침입하였다.고구려가 111년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에 속하기를 구했고, 침입하였다는 것은 漢이 조공을 재개하라 요구한 것이고, 漢이 거부하자 바로 현도를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이러한 전후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하나가 잘못이라 판단하였다. 조공을 받지 못한 오환선비는 121년의 공격처럼 고구려와 공동작전도 하였다. 고구려는 후한과 주로 현도군을 두고 싸웠다. 현도군이 가장 국경과 가까웠고, 요동군 요수현과 서안평현이 요동군이나 낙랑군으로 가는 통로로 추측된다.

 

강단유사사학의 코미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118년 공격한 현도군이 요양 북쪽의 무순이라 하며 화려성은 함경남도 영흥이라 한다. 고구려군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은 현도군을 습격하고 현도군의 화려성을 공격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후한서』 「효안제기」와 『자치통감』도 현도를 공격했다고 기술하고 『후한서』 「동이 고구려전」은 ‘寇玄菟攻華麗城(현도를 침범하여 화려성을 공격하였다)’이라 자세히 기술하여 화려성이 漢의 영토로서 현도군임을 표시하고 있다. 화려성이 漢의 영토가 아니고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처럼 함경도라면 漢나라가 고구려가 그 곳을 공격하는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 강단유사사학은 낙랑 동부도위가 30년에 폐지된 사실도 무시하고 118년까지 낙랑군 동부도위가 살아 있는 것처럼 주장하며, 56년에 고구려 영토가 된 동옥저를 고구려가 또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역은 무순과 영흥 사이로 되는데, 이는 『삼국지』와 『후한서』가 고구려의 영토를 방2천리라 하는 것과 부합하지 않는다. 도대체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은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전술하였듯이 7세기에 활동하여 날조되지 않은 「군국지」를 본 이현은 서안평과 대방이 요동군에 속한다고 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서안평을 단동이라 하고 대방을 낙랑군 소속으로 황해도라 하는데, 서안평과 대방이 요동군에 속하므로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은 성립할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의 코미디는 끝이 없다 단동에서 발굴된 기와에 ‘安平樂未央(평안함과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이라는 문구가 발견되기 때문에 단동을 서안평이라고 한다. 타지역은 말 할 것도 없고, 남안평, 동안평, 안평에 사는 사람도 이 문구를 쓸 수 없었다. 서안평에서 사는 사람만 安平樂未央을 쓸 수 있었다. 당시 漢나라는 고도의 지적재산권 보호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강단유사사학은 세계 최초로 발견하였다. 유사사학의 유사성 수준을 세계만방에 알린 쾌거라 할 수 있겠다. 기와의 길상구를 지명으로 전환하는 유사사학자들의 천재성은 유사역사학계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