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여는 CE 22년 고구려에 의해 망했다. 비류계 세력은 BCE 6년 소서노 사망 시 온조계에 의해 숙청된다. 온조 정권에서 버림 받은 비류계 세력이 비류 후손을 중심으로, 대방고지(후에 대방군이 되는 지역)가 황하의 수류변동으로 황하에 의해 온조백제와 격리되자 독립하였다. 이들이 부여를 국호로 한 것은 당시 동부여가 망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비류백제의 건국은 CE 22년 이후이다. 『후한서』는 CE 49년에 부여가 조공한 후 해마다 사절이 왕래하였다고 한다.따라서 예부여의 건국은 22년에서 49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 추측할 수 있다.
예부여가 본래 현토군에 속해 있었고 漢 말 공손씨에 복속했다는 것과夫餘王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을 현토군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王이 죽으면 그것을 가져다 장사지냈다는 것은 예부여가 현도군과 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부여왕의 도장에 ‘濊王之印’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다.후한에서 현도군은 구 낙랑군 동부도위 지역으로 이동했으므로, 이로부터 예부여가 황하 하류 예(왜)를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그 부근이 예부여의 영역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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