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의 쿠빌라이는 사무역을 금지하고, 관민 합자의 무역선(관7, 민3)만 허용하였지만, 성종은 해금을 철회하고 적성국이었던 일본과의 무역까지 허용하였으면서도, 백제유민과 고려와의 왕래는 금지시켰다. 고려와 백제유민이 결합할 경우 원의 통치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 말엽인 1348년부터 백제유민인 방국진과 장사성은 원의 쇠약을 틈타 독자세력화 하였지만, 주원장이 이들을 제압하고, 1368년 즉위하여 백제유민의 본거지격이었던 주산군도를 철저히 파괴하고 해금정책을 실시하자, 생활기반이 파괴된 백제유민은 해적이 되었다. 명나라는 이들을 왜구라 불렀다. 명이 이들을 왜구라 한 이유는 전술하였듯이 양자강 어귀가 원래 왜인들이 정착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대 왜구의 왜는 고대에 사용되었던 종족의 명칭이고, 지역명으로서의 왜(일본)와는 무관하다. 전술하였듯이 백제유민을 당이 신라라 하고, 북송이 고려라 하였다는 것은 중국인이 백제유민이 조선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명이 해적을 고려구나 조선구라 할 수는 없었으므로 고대에 사용되었던 왜라는 종족명을 사용하여 왜구라 한 것이다.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은 명이나 고려를 침략한 왜구가 일본의 해적이라고 사기를 친다. 당시 일본은 원양항해선을 만들 수 없어 백제유민이 배에 태워주지 않으면 중국 동해안에 갈 수도 없었다. 『명사』가 「일본전」에 왜구 관련 기사를 쓴 것은 『삼국지』와 『후한서』가 양자강 어귀의 왜집단과 열도를 의미하는 왜를 혼동하여 왜조에서 함께 기술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료에 왜구라 되어 있으니 일본의 해적인 줄 착각하여 「일본전」에 기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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