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현은 연소왕이 수도로 한 계이고 연하도는 호타하 남쪽이다.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북경 부근의 계는 사기이다.
진개 침략 전 연나라의 수도는 남역수와 요동고새 사이이다. 한비자는 연소왕이 계(薊)를 수도로 삼았다고 했는데, 강단유사사학은 薊를 북경이나 천진 부근이라 하고, 현재의 역현(이현)을 武陽 즉 연하도라 주장한다. 역현은 소왕의 영토확장 전 국경인 요동고새의 북쪽인, 중역수와 북역수 사이이다. 진개의 침략으로 북경까지 영토로 하자 연소왕은 수도를 요동고새 북쪽인 역현으로 옮겨 계라 하였다.
따라서 역현의 초기 유물은 진번조선의 유물이다. 역현 신장두 30호묘에서 한국식 꺽창과 흉노계통의 금장식이 출토되었다. 조선의 화폐인 명도의 고식(古式)이 하북성에서 발견되었고, 그 거푸집이 역현과 승덕에서 출토된다. 역현의 연나라 유물은 연소왕 이후의 것만 출토된다. 북경이나 천진 부근에 연나라의 수도는 없음에도 역현을 연나라의 하도로 사기치기 위해 중제·강단유사사학은 북경 부근을 계라 주장하고 있으나 실체는 없다.
연소왕이 남쪽으로 제 중산을 평정하고 황하까지 경계로 하였다면 하도는 남쪽에 만들어야 한다. 북쪽으로 영토를 넓혔어도 약간 넓혔을 뿐이고 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집중해야 할 곳은 제 조 등이 있는 남쪽이므로 원래 수도인 남역수와 요동고새 사이보다 북쪽에 하도를 만들었을 수는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水經注』 「역수」편의 “역수는 또 동으로 무양성 남쪽을 지나는데, 대략 변하여 저절로 넓어져 무부관을 지나 동쪽으로 나온다. 그래서 무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연의 하도이므로 마음대로 무양이라 이름 붙였다.”라는 문장을 근거로 역현이 연하도라 주장하나, 같은 「역수」편 뒤에 나오는 무양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 오류임이 확실하다. 『水經注』 「역수」편은 『사기』 「조세가」의 “효성왕 19년(BCE 247년) 조와 연은 땅을 바꾸었다. 조는 연에게 용태(龍兌)와 분문(汾門)을 주고, 연은 조에게 갈성(葛城)과 무양(武陽)을 주었다.”라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즉 이곳이다.”라 하고 있다. 역현이 무양이라면 조는 무양을 받아도 아무 쓸모가 없는 땅이다. 연이 호타하를 경계로 조와 접하고 있다가 연소왕 때 남쪽으로 황하까지 영토를 더 넓혔는데, 연 영토의 북쪽에 있는 무양을 어떻게 실효지배할 수 있겠는가? 대로부터 상곡을 넘어 역현을 점유할 수도 없다. 태행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며, 소진도 秦이 대와 상곡을 넘어 연을 공격하여 이기더라도 지킬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연하도는 연소왕이 새로 넓힌 남부의 땅에 있어야 한다.
연소왕 이후 수도인 계는 역현 즉 중제·강단유사사학이 말하는 소위 ‘연하도’이고 북경이나 천진 부근이 아니다. 계 즉 현재의 역현은 지금의 보정시로 보정시의 옛 지명은 탁군이다. 역현(탁)은 하북성에서 상곡 대를 거쳐 중원으로 가는 길의 입구인 요충지이므로 한비자가 탁과 방성을 대표로 말했을 것이다. 연소왕은 상곡을 확보하여 역현으로 수도를 옮겨도 된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점령지를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역현으로 수도를 옮겼으리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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