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은 『삼국사』에서 왜왕 취임이나 백제 왕족이 열도에 공무로 출장가는 것을 인질로 표현했고 왜왕의 보고와 왜왕에 대한 지시를 사신(외교관계)으로 표현했다. 이는 「일본서기」를 역사서로 간주한 김부식의 무지로 인해 생긴 표현이다. 그는 백제의 관직명 ‘왜왕’을 왜국의 왕으로 생각하였다. 낙랑군이 요양이라고 생각하여 대륙백제의 사료를 싣지 않았던 것처럼, 김부식은 올바른 원사료를 변개(김부식의 생각에선 오류를 수정)하였거나 올바른 사료를 버리고 「일본서기」와 같은 그른 사료를 채택하여 기록하였다. 아신왕이 397년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것은 태자가 왜왕으로 취임하였음을 의미한다. 태자를 왜왕으로 보냈다는 것은 당시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으로 열도 경영(물자와 인력 수탈)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아신왕이 402년 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술을 구했다는 것은 왜왕(태자)에게 구술을 구해서 보내라 명령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이 죽은 후인 409년 왜왕이 야명주를 보내온다. 왜왕이었던 전지왕이 왕으로 취임하기 위해 백제로 올 때는 군사 1백명의 호위를 받는다. 인질을 호위해서 보내주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 전지왕이 418년 보낸 비단 열 필은 왜왕에 대한 하사품이다. 비유왕 2년(428년) 왜국의 사신이 왔는데 따라온 사람이 50명이었다는 것은 사자가 호위병 50명에 해당하는 직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653년에 의자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왜왕은 의자왕의 아들인 풍인데 무슨 우호관계를 더 맺을 수 있겠는가? 복신은 인질로 있던 풍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하는데 「일본서기」는 풍의 귀환을 위해 5천명의 호위부대를 보냈다고 한다. 이는 풍이 왜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원이다. 「일본서기」는 663년 27,000의 병력을 백강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가 본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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