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는 400년에 지역명칭으로서의 왜 즉 열도 백제인의 공격을 격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400년 기사 199자 중 절반이 지워져 있다. 2면 9행 윗부분 9자가 연속하여 지워졌고, 2면 10행과 3면 1행은 거의 완전히 지워졌다. 3면 2행부터 6행까지 윗부분 약간이 지워졌는데 이는 3면 1행이 자연스럽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지운 것이다. 3면 2행부터 7행까지 아랫부분이 지워졌는데 이는 3면 1행이 자연스럽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게 하고 407년의 기사를 지우기 위함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판독이 안 되는 글자 대부분이 2면 9행 10행과 3면 1행에서 7행까지에 있다. 이는 인위적으로 글자가 지워졌음을 의미한다. 일제유사사학이 400년 기사를 지운 것은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벌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2면 8행 하단 倭賊退와 9행 背急追至任那加羅 사이에 고구려군이 바다를 건넌 사실이 적혀 있었을 것이고, 글자가 거의 다 지워진 2면 10행과 3면 1행에는 열도의 구주와 본주로 고구려군이 진격하는 상황이 기술되어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에게 한반도에서는 한수 이북의 여러 성을 뺏겼고 요동반도에서는 관미성을 뺏겼고, 급기야 396년에는 백제 경제의 핵심 지역인 韓 북부를 뺏겼다. 백제는 고구려에 대해 반격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요동반도에서 393년 관미성 회복에 실패하였고 394년 수곡성 부근 싸움에서도 졌다. 한반도에서는 395년 패수 전투에서 졌다. 그래서 백제는 승산이 적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보다는 고구려 영향하의 신라를 공격하기로 하였을 것이고, 거듭된 패전으로 국력이 소진되어 전라도왜와 열도주민으로부터의 징발을 강화하기로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397년 왜왕으로 태자 전지를 파견하였다. 백제가 광개토대왕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열도경영을 강화하면서, 왜왕이라는 관료를 신설하고, 전지를 초대 왜왕으로 파견하였다. 399년 신라를 침입한 왜인들을 내물왕이 백성으로 삼았다는 것은 백제가 신라에 대한 공격을 명하자 전투의지 없이 신라로 보내진 전라도 왜인들이 신라에 항복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는 거듭된 전투로 징집이 증가하여 백성들이 신라로 달아났다는 399년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신라가 399년 왜인들의 항복을 고구려에까지 보고할 정도로 항복이 대규모였다. 전라도 왜의 대규모 동원을 본 고구려와 신라는 백제가 열도주민을 동원하여 신라를 대규모로 침공하려 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백제가 400년 열도주민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침공 전에 이미 열도를 정복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을 것이며, 동해안 항구에 군선을 새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고구려가 396년 수군으로 韓백제의 북부와 한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을 정도이므로 韓백제보다 전력이 훨씬 낮았을 열도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가 400년 기사를 날조한 사실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결론은 백제의 관료인 왜왕이 다스리는 열도의 상당부분을 광개토대왕이 점령하였다는 것이다. 후에 열도의 백제인(일본인)들이 대진(소위 발해)을 두려워하였던 것은 광개토대왕 때의 경험으로 인하여서일 것이다. 『태백일사』에는 이 시기 열도에서의 사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과 부합할 것이다.
한 번 바다를 건너서부터 이르는 곳마다 왜인을 격파했는데, 왜인은 백제와 한통속이었다. 앞서 백제는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연달아 침범하게 했다. 열제가 몸소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술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취했다.
일제유사사학의 특성으로 볼 때 그들은 원문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날조되지 않은 광개토대왕릉비 원문을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400년 기사에 대해선 날조되지 않은 원문을 토대로 역사적 사실을 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고 원문이 확보되지 않은 현재 가장 타당한 추측은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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