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광개토대왕릉비가 폭파되지 않은 이유

역사회복 2024. 5. 19. 22:49

일제 참모본부의 한문해독능력이 유치원생 수준이어서 광개토대왕릉비는 폭파되지 않았다. 그들의 문장독해능력이 초등학생 수준만 되었더라도 광개토대왕릉비는 사라졌을 것이다.

일제·중제·강단유사사학의 도해파 주장의 모순성

이들 유사사학은 도해파를 날조로 보지 않고, “倭가 신묘년에 (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쳐서 臣民으로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도해파를 인정하면 광개토대왕릉 비문은 문장이 되지 않는다. 즉 이들은 말도 되지 않는 문장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

첫째, 이들 유사사학의 주장은 고구려 천하관에 배치된다. 속민이나 신민을 거느릴 수 있는 주체는 고구려밖에 없다. 왜가 다른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표시하는 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에 배치되므로, 고구려의 강성함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비에서 불가능한 표현이다. 고구려의 토벌대상으로 나오는 왜에게 臣民을 둘 정도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왜가 실제로 백제와 신라를 다스렸더라도 ‘왜가 포학하게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라는 식으로 써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 이외의 다른 국가가 신민을 거느리거나 거느리려 하였다고 결자를 보완하거나 자구를 수정하는 어떤 시도도 옳지 않다. 또한 속민과 신민은 같은 의미이고 백제와 신라는 이미 속민이라 규정했으므로 다시 ‘고구려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하였다(삼았다)’라고 만드는 시도도 옳지 않다.

 

둘째, 이들 유사사학의 주장은 이어지는 비문의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왜가 나쁜 놈의 두목이므로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고구려가 왜를 격파한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백제를 격파한 사실이 주가 되고 있다. 왜를 언급할 때는 백제가 왜와 내통한 사실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기해년 기사에서 침입한 것은 왜인데, 백제가 396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한 맹세를 어기고 왜를 사주했다는 것을 먼저 지적한다. 404년 기사는 요동반도 왜의 침입인데 백제와의 내통을 언급하고 있다. 백제가 왜의 신민이라면 왜의 침입 시 백제와의 내통이나 백제가 맹세를 어겼다는 사실을 도대체 언급할 수가 없다. 그것을 언급하면 말하는 사람만 바보된다. 내통이 있더라도 자기 부하에게 지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가 주인이고 왜가 종이기 때문에 종이 행동해도 주인인 백제가 미워, 백제가 사주한 것을 먼저 말하는 것이다. 릉비문의 화자는 왜는 백제의 조종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왜가 침입을 해도 백제가 조종한 것에 분개하고 있다. 화통이나 내통이라 표현한 것은 왜도 백제도 고구려의 아래에 있어야 하므로, 백제가 왜 위에서 왜를 조종했다고 말하는 것조차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어떻든 왜와 백제의 우열관계 판단에서 백제의 우월한 관계를 명시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이들 유사사학의 주장과 정면으로 모순된다. 즉 이들의 해석에 의하면 앞 뒤가 어긋나는 문장이 된다. 초등학생의 독해력만 있다면 문맥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도해파가 날조임을 바로 알 수 있음에도 이들은 임나 선생님의 강림을 위해 눈을 감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