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문장의 날조
기해년 문장도 날조되어 있는데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于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喜後) (稱)其忠□ □遣使還告以□計
‘潰于城池’가 ‘潰破城池’로 날조되어 있고, 喜後가 지워져 있다. 날조를 바로잡아 해석하면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내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순시하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있다가 성지(城池)에서 도주하여, 신이(노객은 신라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신하임을 자처하는 말임) 그들을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왕께 보고하여 명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기뻐한 후)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어 지시사항을 알리게 하였다.」이다.
유사사학은 날조된 기해년 문장을 토대로 억지 해석한다
일제·중제유사사학과 강단유사사학은 날조된 글자를 수정하지 않고, 「永樂 9年(399) 己亥에 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倭人이 그 國境에 가득차 城池를 부수고 奴客으로 하여금 倭의 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문장이 되지 않고 앞뒤 문장이 연결되지 않는다. ‘奴客으로 하여금 倭의 民으로 삼으려 하니’는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그들은 노객을 신라인이라 한다. 노객은 자신을 낮추는 말에 불과하므로, 노객을 많은 신라 사람이라 해석할 수는 없다. 노객을 신라인이라 인정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문구가 왜인들이 신라인을 왜의 백성으로 삼고자 한다는 뜻이라 주장하는 것 같은데, 도저히 원 문구로부터 그들이 주장하는 뜻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저 억지쓰기라는 그들의 특기를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원문에 의하면, 구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고 命을 청하였는데, 강단유사사학은 命을 구원으로 날조하여 해석한다. 구원을 청하는 것은 광개토대왕이 갸륵하게 여길 신라왕의 충성이 될 수도 없다. 광개토대왕이 계책을 알리는 것은 구원요청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없다.
일제가 기해년 기사를 날조한 이유
일제는 ‘潰于城池’를 ‘潰破城池’로 날조하여 왜의 항복을 신라를 깨뜨린 것으로 변조하였고, 그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기뻐한 것도 감추어야 하므로 太王(喜後)의 喜를 지웠을 것이다. 본고처럼 김병기가 수정한 문장으로 하고 결자를 喜後로 보완하여 해석해야, 광개토대왕이, 항복한 왜인을 백성으로 삼은 일을 보고한 내물왕의 충성심을 칭찬할 수 있고, 광개토대왕이 그 일에 대한 지시도 할 수 있다. 기해년 날조에서도 날조 바로 뒤에 이어지는 문장으로 인해 조작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일제가 기해년 기사를 날조한 것은 399년에 포로가 된 영산강왜가 403년 이후 나라로 보내져 고구려계 국가의 지배를 받고 6세기 이후에는 백제의 지배를 받는 왜집단(일제유사사학에 의하면 야마토왜)임을 숨기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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