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야마의 우전팔번 신사에서 발견된 거울(우전팔번화상경)에서도 열도는 백제관료인 왜왕이 다스리는 곳임이 드러난다. 거울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 斯麻念長泰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명문의 내용은 “계미년 팔월의 날, 삼년상의 마지막 해(503년)에, 남동생 왕이 어시사가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가 길이 태평하기를 바라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두 사람 등을 보내 최상품 구리 이백근을 취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이다. 이 명문에서 무령왕 초기 왜왕은 무령왕의 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형인 무령왕은 백제왕으로서 삼년상을 치르고 있었고,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왜왕에게 거울을 보냄으로써 동생에 대한 신임을 확인하여 주어 열도 통치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열도에서 칼 옥 거울은 삼종의 신기로 취급되어 권력의 원천이었다. 관료인 왜왕의 권력은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백제 왕의 임명에서 나온 것이므로 왜왕들에게는 왕의 신임을 표시하는 물적 증거가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열도에서 동은 708년에나 생산되고 그 전에는 열도 외의 백제에서 공급받았으며 백상동이라는 최고의 동이 원료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거울은 韓 지역에서 제작되어 왜왕에게 하사된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일제유사사학의 날조된 해석문만을 제시하면서 왜왕이 백제의 관료였음을 숨기려 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韓과 濊를 공격하여 倭와 韓이 속하였다 하는 것으로 보아, 韓 지역의 왜는 예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예인 금주리는 거울 기술자로 백제의 서도 한성에 머물렀던 사람일 것이다. 당시에는 동성왕의 韓 지역 회복으로 무령왕은 서도에 있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 멸망 후 열도는 8세기까지 당나라, 신라, 대진의 부용국 (0) | 2024.05.21 |
---|---|
김부식이 열도의 백제 영토를 기술하지 않은 이유 (0) | 2024.05.21 |
왜 광개토대왕릉비문 경자년조는 절반이나 지워졌는가? (0) | 2024.05.20 |
광개토대왕릉비 기해년 문장의 날조 (0) | 2024.05.20 |
광개토대왕릉비가 폭파되지 않은 이유 (0) | 2024.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