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고려)은 1389년 1396년 1419년 대마도의 정착지를 공격하여 힘을 보여주면서, 귀화 허용, 관직 부여, 삼포를 통한 무역 허용을 통해 이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포용하였다. 그러나 삼포왜란과 사량왜변 후 무역 규모를 줄이고 규제를 강화하여 이들을 실질적으로 격리하였다. 조선과 단절된 이들은 중국 동해안에서는 반상반구(半商半寇)가 되어 밀무역과 해적활동을 하고 여타 지역에서는 무역을 하며 일본의 해외무역상이 되었다.
1635년 일본은 해외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이들을 나가사키로 이주시켰는데, 1670년대에 이르러서는 나가사키 전체인구 약 6만 명의 6분의 1인 약 1만 명이 이들 무역상일 정도로 번성하였다. 나가사키의 백제유민은 흥복사를 중심으로 한 삼강방 (三江幇: 절강·강남·상서), 복제사를 중심으로 한 천장방(泉長幇: 복건성 천주·장주), 숭복사를 중심으로 한 복주방(福州幇: 복건성 복주), 성복사를 중심으로 한 광동방(廣東幇: 광동성)이 있었다. 이들이 일본 밖에서는 왜구라 불렸지만, 일본에서는 당인(唐人)이라 불리며 중국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주원장이 왜구라 명명한 실체가 백제유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16세기 중엽 주환이 밀무역을 법대로 강하게 처벌하자, 백제유민과 명정부간 보복이 격화되면서 백제유민은 대학살과 추방으로 중국동해안에서 사라졌다. 『주해도편(籌海圖編)』 「구종분합시말도(寇踪分合始末圖譜)」에 기재된 해적집단의 두목 이름은 모두 중국식 이름이고 일본식 이름은 단 하나도 없다. 『명사』는 대개 진왜가 30%이고 종왜자가 70%라 했는데, 이는 일본에 근거지를 둔 백제유민들이 사무라이를 용병으로 고용했기 때문이다. 15세기 초의 정화 함대는 복건 광동 절강의 백제유민으로 인해 가능했다. 16세기 중엽의 탄압으로 백제유민이 중국에서 사라지자, 명나라에서는 조선(造船)과 항해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는 백제유민이 사라져 중국인 스스로 배를 만들고 항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금정책으로 동아시아의 유일한 해양 무역세력이었던 백제유민을 상실한 조선과 중국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허무하게 서양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반면 백제유민들을 자국민으로 만들어 무역을 하였던 일본은 세상의 변화에 빨리 대응할 수 있었다. 명이 백제유민을 중국 동해안에서 말살하지 않았다면 근대의 세계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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