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 양광에게 현실 자각 타임 선사

역사회복 2024. 6. 6. 08:09

 

양광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년 동안 전쟁준비를 한 후, 612년 11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당하를 건너 요동성 등 국경 부근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장안성(금주)으로 바로 보낸 수군도 패수(소릉하)에서 대패했고, 별동대 30만을 장안성에 보냈으나 보급 실패로 굶주려서 후퇴하다 살수(연태하)에서 거의 다 죽었다.

본고의 위치 비정은 당시의 양광 조서로 입증된다. 양광은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혼미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들면서 요(遼) 예(濊)의 경계를 자주 잠식하였다.”라고 하므로, 갈석산이 낭아산이고, 요수가 당하이고, 예가 황하 어귀 해안가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는 본고의 위치비정과 양광의 언급은 일치한다. 양광은 “발해를 덮어 우레와 같이 진동하고 부여를 지나면 번개같이 쓸어버릴 것이다.”라고 하는데, 본고에서 예부여를 이 지역에 위치시킨 것과 일치한다. 부여를 예부여로 보지 않는다면 양광의 말은 이해될 수 없다. 동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이므로 고구려를 지나야 갈 수 있기 때문이다. 24군과 별동대 9군이 가는 길 이름이 고구려 유주 각 군현의 명칭이다. 옥저에 대해선 본고에서 남옥저가 이 지역에 있다고 하였고, 임둔도 본고에서는 韓 지역 북부라고 하였다. 건안 남소는 이 지역의 고구려 성 이름이고, 조선 숙신은 이 지역이 옛 조선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서진은 모용황을 조선공으로 봉하였다. 명해는 낙랑군의 해명현이다. 답돈은 후한 말 요서 요동 우북평 오환 대인의 이름인데 고구려의 지명으로 남겨진 듯하다.

양광은 613년에도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양현감의 반란으로 돌아갔고, 614년에도 공격하였으나 수나라 내부 사정이 혼란하였고, 영양왕이 항복하고 곡사정을 보내자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