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樂良

역사회복 2024. 6. 5. 10:35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연가(延嘉)7년’을 539년으로 보는데,

[7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본고에서 479년의 연호는 영화임을 밝혔다. 59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599년에는 북제, 북주, 수대의 조각양식이 등장하고 있어(곽동석, 『한국의 금동불 1』, 다른세상, 2016. 56쪽)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539년은 안원왕 9년인데, 안원왕으로의 승계 시 혼란으로 인해 연호의 사용이 늦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불상광배 뒷면에 ‘高麗國樂良東寺’가 새겨져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樂良’을 지금의 평양이라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듯이 6세기에 濼浪이 樂良으로 변하여 쓰여졌다면, 덕흥리고분과 안악3호분(동수묘)에 의해 고구려에 유주 濼浪郡이 있었음이 입증되므로, ‘高麗國樂良’은 고구려 유주의 樂浪郡으로 보아야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어떤 근거도 없이 樂良을 평양이라고 억지를 쓴다. 지금의 평양은 최리의 낙랑국이 되었다가 CE 32년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漢城(남평양)으로 불렸으므로 6세기에 樂良이라 표기될 수 없다. 평양은 고구려 수도의 명칭이므로, 수도를 평양이라는 지명 대신 변방에 있는 한 군의 명칭으로 부른다는 것은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의 억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고구려의 보정시 일대 지배를 숨기려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