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묘 묵서명은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으로, 나이 69세에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
강단 사기꾼들은 영화13년을 사마담(동진 목제)의 연호로서 357년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담은 영화란 연호를 356년까지 사용하였고 357년에는 승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1. 고구려가 당시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던 남조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2.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가정하더라도, 3년상을 하여 무덤을 닫는 시점은 사망일 후 최소 1년 2개월 최대 2년 2개월이 지난 후이며, 연호가 바꿔진 때로부터는 최소 2년이 지난 시점(3년째 해)이다. 357년 연호를 승평으로 바꿨고, 359년의 어느 시점에서 무덤을 닫는데, 그 때까지 연호가 승평으로 바꿔지는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3. 과거의 장례는 지금과 다르다. 그 의미가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그 후손이 그 정도의 무덤을 축조할 정도의 힘을 가진 경우라면, 연호 변경 3년째까지도 연호 변경을 모를 가능성은 전무하다.
강단유사사학은 기본적 사실관계를 부정하고 소설을 창작한다. 고구려 유물에서 발견되는 모든 영화 연호를 3세기 동진의 연호라 주장한다. 강단의 소설에서도 313년 이후에는 낙랑 대방군이 사라졌음에도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영화 연호가 있는 유물을 중국의 유물이라고 사기친다.
영화는 장수왕이 사용한 연호이다. 현시력에 의하면 481년도 10월 1일이 戊子일이다. 즉 동수묘의 영화 13년 10월 무자삭월과 일치한다. 따라서 영화는 469년부터 사용된 고구려의 연호이다.
동수는 고구려인으로 413년 광개토대왕이 407년 정복한 하북성 지역에서 고구려 관리(요동 태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유주 요동군 출신의 고구려인이다. 동수가 역임한 관직은 고구려의 관직이다. 물론 사지절 도독제군사 평동장군 호무이교위 등이 위나라로부터 받은 관작으로 추측되지만 이는 고구려의 관리로서 장수왕이 위에게 요청하여 받은 것이므로, 실질상 고구려왕이 준 지위이다. 동수는 현지에서 태어나 우리말도 하고 현지어도 잘 하였으므로 낙랑 韓 창려 현도 대방 등 유주 지역 전문 관료로서 근무하다가 죽어서 가문의 묘지인 안악에 묻힌 것으로 추측된다.
동수가 광개토대왕이 407년 정복한 후연 고토에서 계속 관료로 활동하다 죽었다는 것은 이 지역을 고구려가 480년대 초까지 계속 영유하였음을 의미한다. 동수가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는 것은 481년 10월 동성왕의 공격 시에 사망한 것을 의미한다.
나는 사마담이 연호를 357년 승평으로 바꾸어서 너무 고맙다. 사마담이 연호를 358년에 바꾸었다면 강단사기꾼들의 개소리를 반박할 증거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마담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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