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주원장이 경인왜구 침입의 원흉

원의 쿠빌라이는 사무역을 금지하고, 관민 합자의 무역선(관7, 민3)만 허용하였지만, 성종은 해금을 철회하고 적성국이었던 일본과의 무역까지 허용하였으면서도, 백제유민과 고려와의 왕래는 금지시켰다. 고려와 백제유민이 결합할 경우 원의 통치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 말엽인 1348년부터 백제유민인 방국진과 장사성은 원의 쇠약을 틈타 독자세력화 하였지만, 주원장이 이들을 제압하고, 1368년 즉위하여 백제유민의 본거지격이었던 주산군도를 철저히 파괴하고 해금정책을 실시하자, 생활기반이 파괴된 백제유민은 해적이 되었다. 명나라는 이들을 왜구라 불렀다. 명이 이들을 왜구라 한 이유는 전술하였듯이 양자강 어귀가 원래 왜인들이 정착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대 왜구의 왜는 고대에 사용되..

역사 2024.05.27

칼돈(소위 명도전, 연도 제도 등)의 문양은 明이 아니라 朝鮮이다

도폐의 문양​도폐의 문양은 아사달 문양이다. 아사달 문양이 朝鮮이므로 이 문양은 明이 아닌 朝鮮이다. 도폐의 문양이 연나라나 제나라의 화폐가 아닌 조선의 화폐임을 명백히 표시하고 있다. ​​아사달 문양아사달=朝鮮은 아침해가 뜨는 언덕을 말한다. 즉 鮮은 언덕을 의미한다. ​ㅇ 朴光敏. "고조선 국명 및 지명에 대한 어원적(語源的) 고찰(考察)." 온지논총 60. 2019. 211쪽은 [‘鮮’의 古訓에는 ‘작은 산’의 뜻이 있는데, 詩經 에, “度(탁)其鮮原 居岐之陽; 작은 산과 언덕을 헤아려 岐山의 남쪽에 터를 잡으셨네.”라고 하여 ‘鮮’을 ‘山’의 뜻으로 썼다. 西周 때 著作으로 알려진 逸周書 권4 에도, “王乃出圖商, 至于鮮原; 왕께서 마침내 商[殷]을 도모하여 언덕에 이르셨네”라고 하였는데,..

역사 2024.05.25

역현은 연소왕이 수도로 한 계이고 연하도는 호타하 남쪽이다.

역현은 연소왕이 수도로 한 계이고 연하도는 호타하 남쪽이다.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북경 부근의 계는 사기이다. ​진개 침략 전 연나라의 수도는 남역수와 요동고새 사이이다. 한비자는 연소왕이 계(薊)를 수도로 삼았다고 했는데, 강단유사사학은 薊를 북경이나 천진 부근이라 하고, 현재의 역현(이현)을 武陽 즉 연하도라 주장한다. 역현은 소왕의 영토확장 전 국경인 요동고새의 북쪽인, 중역수와 북역수 사이이다. 진개의 침략으로 북경까지 영토로 하자 연소왕은 수도를 요동고새 북쪽인 역현으로 옮겨 계라 하였다.​ 따라서 역현의 초기 유물은 진번조선의 유물이다. 역현 신장두 30호묘에서 한국식 꺽창과 흉노계통의 금장식이 출토되었다. 조선의 화폐인 명도의 고식(古式)이 하북성에서 발견되었고, 그 거푸집이 역현과 승덕에서 ..

역사 2024.05.22

미사흔을 볼모로 잡고 박제상을 살해한 왜는 고구려 위성국인 안라국

실성왕은 402년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데, 미사흔을 볼모로 받는 왜는 광개토대왕이 나라에 설치한 고구려계 국가이다. 열도 정벌 시 고구려군에 협조한 안라국일 가능성이 크다. 400년에 광개토대왕이 열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지배 범위가 축소되고 고구려계 소국이 힘을 얻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열도 백제에 승리하였으므로 백제관료인 왜왕에게는 볼모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실성왕이 정적도 제거하고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나라의 안라국으로 추정되는 고구려계 국가에 미사흔을 보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미사흔을 볼모로 받는 왜는 백제의 관료인 백제 왜왕이 아니다.

역사 2024.05.21

백제 멸망 후 열도는 8세기까지 당나라, 신라, 대진의 부용국

당은 백강전투에서 승리 후 664년 쓰쿠시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672년 5월 철수할 때까지 8년간 약 2,000명으로 구성되는 부대를 6회에 걸쳐 파견하여 열도를 지배하였다. 「일본서기」 38대 천지의 재위 기간인 668년-672년은 당나라의 열도 지배기간에 포함되므로, 열도에 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38대 천지도 당나라와 교섭한 백제인을 모델로 하여 날조된 인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은 672년 요동반도백제와 평양(요양)의 전투에서 신라의 우세가 거의 확정되므로 열도를 지배하기 어려워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당이 열도에서 떠난 후, 672년 6월 신라는 2만 병력을 파견하여 임신전쟁을 통해 친신라정권을 세우고 열도에 최초의 고대국가를 성립시킨다. 「일본서기」 39대 천무..

역사 2024.05.21

김부식이 열도의 백제 영토를 기술하지 않은 이유

김부식은 『삼국사』에서 왜왕 취임이나 백제 왕족이 열도에 공무로 출장가는 것을 인질로 표현했고 왜왕의 보고와 왜왕에 대한 지시를 사신(외교관계)으로 표현했다. 이는 「일본서기」를 역사서로 간주한 김부식의 무지로 인해 생긴 표현이다. 그는 백제의 관직명 ‘왜왕’을 왜국의 왕으로 생각하였다. 낙랑군이 요양이라고 생각하여 대륙백제의 사료를 싣지 않았던 것처럼, 김부식은 올바른 원사료를 변개(김부식의 생각에선 오류를 수정)하였거나 올바른 사료를 버리고 「일본서기」와 같은 그른 사료를 채택하여 기록하였다. 아신왕이 397년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것은 태자가 왜왕으로 취임하였음을 의미한다. 태자를 왜왕으로 보냈다는 것은 당시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으로 열도 경영(물자와 인력 수탈)이 중요해졌기..

역사 2024.05.21

우전팔번화상경은 무령왕의 동생이 왜왕이었다고 한다

와카야마의 우전팔번 신사에서 발견된 거울(우전팔번화상경)에서도 열도는 백제관료인 왜왕이 다스리는 곳임이 드러난다. 거울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 斯麻念長泰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명문의 내용은 “계미년 팔월의 날, 삼년상의 마지막 해(503년)에, 남동생 왕이 어시사가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가 길이 태평하기를 바라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두 사람 등을 보내 최상품 구리 이백근을 취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이다. 이 명문에서 무령왕 초기 왜왕은 무령왕의 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형인 무령왕은 백제왕으로서 삼년상을 치르고 있었고,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왜왕에게 거울을 보냄으로써 동생에 대한 신임을 확인하여 주어 열도 통치의 안정을 ..

역사 2024.05.21

왜 광개토대왕릉비문 경자년조는 절반이나 지워졌는가?

광개토대왕릉비는 400년에 지역명칭으로서의 왜 즉 열도 백제인의 공격을 격퇴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400년 기사 199자 중 절반이 지워져 있다. 2면 9행 윗부분 9자가 연속하여 지워졌고, 2면 10행과 3면 1행은 거의 완전히 지워졌다. 3면 2행부터 6행까지 윗부분 약간이 지워졌는데 이는 3면 1행이 자연스럽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지운 것이다. 3면 2행부터 7행까지 아랫부분이 지워졌는데 이는 3면 1행이 자연스럽게 지워진 것처럼 보이게 하고 407년의 기사를 지우기 위함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판독이 안 되는 글자 대부분이 2면 9행 10행과 3면 1행에서 7행까지에 있다. 이는 인위적으로 글자가 지워졌음을 의미한다. 일제유사사학이 400년 기사를 지운 것은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

역사 2024.05.20

광개토대왕릉비 기해년 문장의 날조

기해년 문장의 날조기해년 문장도 날조되어 있는데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于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喜後) (稱)其忠□ □遣使還告以□計 ‘潰于城池’가 ‘潰破城池’로 날조되어 있고, 喜後가 지워져 있다. 날조를 바로잡아 해석하면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내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순시하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있다가 성지(城池)에서 도주하여, 신이(노객은 신라왕이 광개토대왕에게 신하임을 자처하는 말임) 그들을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왕께 보고하여 명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기뻐한 후)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어 지시사항을 알리게 ..

역사 2024.05.20

광개토대왕릉비가 폭파되지 않은 이유

일제 참모본부의 한문해독능력이 유치원생 수준이어서 광개토대왕릉비는 폭파되지 않았다. 그들의 문장독해능력이 초등학생 수준만 되었더라도 광개토대왕릉비는 사라졌을 것이다.​일제·중제·강단유사사학의 도해파 주장의 모순성이들 유사사학은 도해파를 날조로 보지 않고, “倭가 신묘년에 (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쳐서 臣民으로 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도해파를 인정하면 광개토대왕릉 비문은 문장이 되지 않는다. 즉 이들은 말도 되지 않는 문장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첫째, 이들 유사사학의 주장은 고구려 천하관에 배치된다. 속민이나 신민을 거느릴 수 있는 주체는 고구려밖에 없다. 왜가 다른 나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표시하는 것은 고구려의 세계관에 배치되므로, 고구려의 강성함과 광개토대왕의 업..

역사 2024.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