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임나4현 전남설=강단유사사학이 밝힌 고인류학 고생물학의 성과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 512년 이야기를 전라남도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여 임나4현의 위치를 비정한다. 그들은 주장자마다 음상사학에서 일가를 이루어 서로 다른 위치를 주장하고 있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음상사를 통해 임나4현을 경남, 전북, 충남, 경북, 전남, 부산 등 다양한 위치에 비정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주로 섬진강 유역의 전남 동부지역으로 비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현을 군단위 이상으로 보아 4현을 4군 이상의 영역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원문은 임나4현을 아주 작은 마을로 보고 있다. 이들이 근거로 하는 「일본서기」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 512년 12월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任那國)의 ..

역사 2024.06.29

근거 없이 창작한 가야사 시대구분

필자는 앞에서 『삼국사』,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석이정전』과 『석순응전』 등 객관적 사료에 의해 3세기 말 토착세력이 김수로계로부터 가야 왕권을 탈취하였음을 입증하였다. 그런데 강단은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추종하기 위해 어떤 근거도 없이 가야사를 난도질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야사를 구분하고 있다.   문헌상으로 보아 「가야」라는 이름을 쓰는 국가는 둘이 있다. 400년경까지는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라고 칭하였고, 5세기 후반 이후로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가야라고 칭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보아 4세기 이전의 문화 중심은 김해지역이고, 5세기 이후의 문화 중심은 고령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일단 4세기 이전을 전기 가야시대, 5세기 이후를 후기 가야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역사 2024.06.28

『삼국사』 「강수전」의 임나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本은 선조(근본)를 의미하며, 任那加良의 加良은 음을 가라로 볼 수 있는데, 가라는 구루=城=마을=국가의 뜻이고 일족 친족 혈족 동족 등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이 문구를 “신은 본래 임나가야 사람입니다”라고 해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강수가 말한 임나가량이 가야의 고령이나 김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강수의 부 석체는 신라의 관직인 나마를 지냈다. 강수는 신문왕(재위 681-692년) 때 사망하므로 강수의 나이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강수는 가야가 멸망한 지 한참 후에 태어..

역사 2024.06.27

한반도 남부 삼한론 (=원삼국론)의 소설성

삼한 남한론(=원삼국론)은 조선총독부의 소설강단유사사학은 『삼국사』, 『삼국유사』, 기타 중국 사서 등에 전혀 근거가 없음에도, 한반도 남부에는 원래 진국이 있었고, 진국은 韓으로 통칭되기도 하였는데, 점차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BCE 3~2세기 이른바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점토대토기문화 또는 세형동검문화를 영위하던 세력집단이 진국이었고, 진국으로 남하한 준왕과 역계경, 예맥조선 멸망 시의 유이민으로 인해 진국이 해체되지만, 그 핵심 세력은 BCE 1세기 초 이전에 중서부지역에 마한과 중부 이남지역에 변한 그리고 소백산맥을 넘어 경상도 지역에 진한을 세운다고 하면서, 현재까지는 이같은 사실을 문헌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도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사료가 없..

역사 2024.06.23

강단유사사학이 멋쩍어서 날조한 창녕비 관경비설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임나의 멸망에 대해 뜬금없이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참고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갑자기 창녕비를 들고나온다. 그들은 창녕비에 순수관경이라는 문구는 없어도 창녕비를 척경비(拓境碑)나 순수관경(巡狩管境)비로 볼 수 있어, 창녕이 당시 가야와 국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흥왕이 창녕까지 巡守해 와서 軍勢 시위를 하고 일련의 사면조치도 취하였고, 이는 가야연맹 제국에 대하여 위협과 유화의 시위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창녕비문 어디에도 순수관경이라는 문언이나 척경이라는 문언이 없다. 창녕비 어디에도 군세 시위를 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의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① 제목[題記] ② 순수배경과 경과[紀事] ③ 왕을 수행한 사람[隨駕人名列記]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역사 2024.06.09

강단유사사학은 가야 멸망 시엔 ‘가야=임나’를 부정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에 대해선 철저히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가야=임나라고 소설을 쓰면서 「일본서기」의 임나를 가야라고 우기다가, 갑자기 가야의 멸망에 대해선, ‘가야의 반란’이라는 문언은 무시하지만,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참고하여 562년에 가야가 망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562년 이후에도 신라와 전쟁을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임나가 7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등장하는데, 그들도 7세기까지 임나를 한반도에 존치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꼈는지, 태세전환하여 562년 임나(가야)가 망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가야가 망한 후에도 「일본서기」에 왜 임나가 나오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조선총독부 선생님들이 교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의 소설에 대한 무조건적 ..

역사 2024.06.09

강단유사사학의 불교 전래에 관한 사기 번역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삼국유사』 「塔像第四」 金官虎溪寺婆娑石塔者昔此邑爲金官國時, 世祖首露王之妃許皇后名黄玉, 以東漢建武二十四年甲申, 自西域阿踰陁國所載來. --- 首露王聘迎之, 同御國一百五十餘年. 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 蓋像敎未至. 而圡人不信伏. 故本記無創寺之文.​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해동에 절을 세워 불법을 받드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대승불교(像敎)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

역사 2024.06.08

고구려, 양광에게 현실 자각 타임 선사

양광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1년 동안 전쟁준비를 한 후, 612년 11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당하를 건너 요동성 등 국경 부근의 여러 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장안성(금주)으로 바로 보낸 수군도 패수(소릉하)에서 대패했고, 별동대 30만을 장안성에 보냈으나 보급 실패로 굶주려서 후퇴하다 살수(연태하)에서 거의 다 죽었다. 본고의 위치 비정은 당시의 양광 조서로 입증된다. 양광은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혼미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들면서 요(遼) 예(濊)의 경계를 자주 잠식하였다.”라고 하므로, 갈석산이 낭아산이고, 요수가 당하이고, 예가 황하 어귀 해안가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는 본고의 위치비정과 양광의 언급은 일치한다. 양광은 “발해를 덮어 우레와 같이 진동하고 부여..

역사 2024.06.06

양견의 허세와 굴복

양견(수문제)이 597년 “王은 遼水의 폭이 長江과 어떠하며, 高麗의 인구가 陳國과 어떠하다고 보는가?” 하면서 고구려를 위협하는 문서를 보내자, 고구려는 598년 濊 군사 일만으로 요서(당하 상류 남부)를 공격하였다. 濊병은 황하 하류 예인이나 예부여의 예인이다. 고구려의 공격에 영주총관 위충이 대응하자 후퇴하였다. 양견은 예상치 못한 고구려의 치고 빠지기에 당황하고 분노하여,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서둘러서 6월 양량과 왕세적을 장군으로 30만을 임유관을 통해 고구려로 보내고, 식량은 배로 황하로 보내려고 하였는데 강이식은 이를 눈치채고 보급선을 파괴하고 성을 지키면서 시간을 끌자 수의 병사들은 굶주려 병에 걸리는 상태가 되었다. 9월 수군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자, 고구려군은 임유관까지 추격하..

역사 2024.06.06

온달의 북주 침략 격퇴

북주가 우문옹(무제) 시 요동에 침입하였는데, 배산(拜山)의 벌판에서 온달의 활약으로 크게 이겼다. 위가 북제와 북주로 나뉘고 북주가 577년 북제를 멸한 후 고구려와 경계를 마주하여 북주가 침입하였다. 『태백일사』는 갈석산과 배찰산에 가서 토벌하고 유림관까지 추격했다고 하며, 유림은 산서성과의 경계라 한다. 배산의 벌판은 갈석산에서 남쪽으로 더 간 배찰산 부근, 보정시 남쪽의 벌판으로 추정된다. 유림관은 임유관의 다른 명칭으로 추정되며, 산서성과의 경계이므로 보정시 남쪽에서 서쪽으로 산서성으로 가는 도정의 태행산맥에 있는 관으로 추정된다. 북주나 수는, 상곡은 고구려의 영토이므로 상곡과 거용관으로 나올 수 없고, 거용관에서 직선거리로 50km 남쪽의 임유관을 통해 요동으로 나와 고구려의 남쪽 지역을 침..

역사 2024.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