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백제 한씨 미녀와 고구려 안장왕은 어디에서 만났는가?

강단사기꾼들은 경기도 어딘가에서 만났다고 사기친다. 그러나 이 둘의 만남은 요동반도에서 있었다.​신당 전쟁은 요동반도 요하 태자하 선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단사기꾼들은 임진강 부근에서 싸웠다고 하면서 신라의 국경은 대동강이라고 한다. 요동반도의 지명과 음상사 지명을 찾은 것이 임진강 부근인데, 일제의 교시는 신라 국경이 대동강이라고 하여 두 사실에 모순이 발생한다. 물론 사기꾼들은 거짓말로 이 모순을 숨기고 있다. [임진강과 대동강 사이가 무주지였다가 735년 당나라가 거저 신라에게 주었다고 사기 친다. 그러나 675년부터 735년까지 이 평야 지역이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사기꾼들은 신라가 점점 북상해서 대동강까지를 점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

역사 2024.05.18

백제도 근초고왕 시 낙랑군을 영토화했다

246년 이후 백제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낙랑은 당연히 낙랑군 본군이다. 韓 지역 즉 백제는 낙랑군 동남쪽이다. 286년 책계왕이 대방왕과 혼인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항한 것은 황하 항해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304년 분서왕이 낙랑 서쪽 현을 취하였다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삼국사』 편찬자들이 온조왕의 낙랑군 동부도위에 대한 언급을 본군으로 착각하고 낙랑 동쪽 현을 취하였다는 기사를 낙랑 서쪽 현을 취하였다고 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이왕과 분서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것은 황하 항해의 안전을 위해 황하 서쪽인 낙랑군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진 말 ‘흉노’ 선비 등 중국 북부의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남하하여 중국 북부를 통치하는 소위 북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그 혼란기를 ..

역사 2024.05.17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광서성) 출신

흑치상지 묘지명에 ‘그 조상은 부여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자강 하류 이남의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빈랑(檳榔)이라는 나무 열매를 항상 씹어 이가 검게 된다고 한다. 『삼국사』, 『구당서』, 『신당서』 모두 “黑齒常之 百濟西部人(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인이다)”이라 하는데, 『구당서』와 『신당서』는 월주가 백제의 서부 지역이라고 한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월주는 전술하였듯이 진평을 의미한다.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도 흑치상지의 출신지인 백제 서부가 지금의 광동성 흠현 서북이라고 하는데, 흠현이 광서성 남령시(南寧市) 동남쪽이므로 흠현 서북은 백제향 즉 진평이다. 진평=흑치는 백제의 동남아 무역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백제가..

역사 2024.05.17

백제의 진평은 광서성

『송서』, 『양서』, 『양직공도』, 『남사』, 『통전』의 진평과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 서부 지역인 월주는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이다. 『송서』에 의하면, 광주(廣州) 울림군(鬱林郡)에 진평현이 있었으며, 『中國地圖集』(1995년판)에는 宋나라가 설치했던 진평현 경내에 지금까지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살아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도 장족자치구의 현지인들은 백제향의 중심지인 백제허를 대백제(大百濟)라고 읽으며, 전라도에서 사용되었던 외다리방아와 맷돌을 사용하고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도 진평현이 광서성에 있다고 한다. 진평이 북조의 사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진평이 중국 남쪽 즉 남조 영역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2024.05.17

백제 첫 수도인 비류의 위례성은 두번째 수도인 온조 위례성의 동북쪽

BCE 2년에 낙랑군 동부도위가 불태운 위례성은 한수 동북쪽의 주민을 징발하여 수리한 것으로 보아 비류의 첫 위례성이고, 이로부터 미추홀이 낙랑 동부도위와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비류의 위례성이 온조의 위례성 동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이 인천을 비류, 온조를 서울이라 하여 한반도에 비정하는 것은 두 위례성의 위치관계 확인만으로도 날조임이 드러난다.

역사 2024.05.17

백제의 시조는 소서노이고 첫 도읍지는 미추홀이다

온조 시조설에 의하면 BCE 5년의 천도가 설명되지 않는다. 온조 시조설에서 기술하는 도읍지는 한산 부근 한수 남쪽이다. 그런데 온조가 천도한 도읍지도 한산 부근 한수 남쪽이다. 따라서 비류 시조설의 미추홀이 첫 도읍지(위례성)이고 온조의 한수 남쪽 위례성은 두 번째 도읍지(위례성)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소서노로 추정되는 국모가 죽은 후에 온조가 한수 남쪽으로 천도하기로 한다는 것은, 소서노의 죽음 당시 소서노 비류 온조 모두 미추홀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비류는 소서노의 결정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소서노가 죽자 온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 BCE 6년 소서노 사망 이전 백제 기록은 소서노왕 시의 일이다.

역사 2024.05.16

대마도가 국제법상 우리 영토인 이유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여러 증거가 많지만 국제법적으로 가장 확실한 증거는 김상훈 선생이 발견하였다. 김상훈 선생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https://www.vanchosun.com/news/main/frame.php?main=1&boardId=17&bdId=44463&cpage1=587  일본의 개항 직후 미국은 일본 본토에서 1000여km쯤 떨어진 태평양의 무인도 '오가사와라'를 발견했다. 이를 미국령에 편입하려고 했다. 미·일 간 영토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일본은 그 섬이 나와있는 자국의 지도(1785년)를 제시했다. 지도 작성자는 하야시 시헤이(林子平)로, 일본의 영토 주권에 가장 먼저 눈떴던 인물이었다. 그는 '해상방위를 튼튼히 하고 주위의 무인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야 한다'고 ..

역사 2024.05.14

고구려는 북경 平谷區(당시 요동군)에서 건국

광개토대왕릉비는 건국 도읍지를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라고 기술한다. 이 문구를 “비류곡 홀본 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러한 의미가 되기 위해선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이 아니라 ‘城於沸流谷忽本西山上’이 되어야 하므로 옳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구려가 漢의 부용 세력으로서 漢의 영토인 요동군 내에서 건국하여, 원천적으로 성을 쌓을 수 없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문자 그대로의 올바른 해석은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 위에 의거하여 도읍을 세웠다” 이다.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 순천부총도(順天府總圖)에 성산(城山)이 구수(泃水) 서쪽에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비류수는 구하이고, 비류곡 즉 홀본은 금해호(金海湖) 서쪽 구하 유역(지..

역사 2024.05.13

낭야는 어디에 있었는가?

중제유사사학과 강단유사사학은 제장성 북쪽이 제나라이고, 남쪽이 초나라라고 사기친다.제장성 북쪽이 번조선의 영토였음을 숨기기 위해서이다. ​낭야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확인하면 그들의 사기를 바로 알 수 있다. ​영정(진시황)은 남으로 낭야산에 가서 경치가 좋아 석 달을 머물렀다. 낭야대에 대해 『사기집해』는 월왕 구천이 낭야대관을 세웠다 하고, 『사기정의』도 『괄지지』와 『오월춘추』를 인용하여 월왕 구천이 도읍을 낭야로 옮기고 관대를 세워 동해를 바라보았다고 하며, 『사기색은』은 『산해경』을 인용하여 낭야대는 발해 사이에 있다고 한다. 여기서 발해와 동해는 모두 대야택을 의미한다. 제나라의 남부에 낭야산이 있어야 월이 강성해졌을 때 낭야와 그 주변을 차지하여 낭야를 수도로 정할 수 있다. 영정이 태산에서 봉..

역사 2024.05.12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

외교는 힘을 가진 주체 사이의 교섭이다. 아무런 힘이 없을 경우 외교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윤봉길 의거 후 적극적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 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은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장개석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를 공동성명에서 채택하도록 한 것이었다. 장개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독립의 구걸이 아닌 윤봉길의 투쟁과 다수의 한국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힘이었다. ​장개석은 일제와의 전쟁에서 한국 독립운동세력의 무장력이 중국에 이로울 것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강토가 없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력투쟁으로 외교적 성과를 가져왔고, 독립을 쟁취했다. 무력 투쟁이 가장 효과적인 외교수..

역사 2024.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