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힘을 가진 주체 사이의 교섭이다. 아무런 힘이 없을 경우 외교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윤봉길 의거 후 적극적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 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은 1943년 카이로선언에서 장개석이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문구를 공동성명에서 채택하도록 한 것이었다. 장개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독립의 구걸이 아닌 윤봉길의 투쟁과 다수의 한국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힘이었다.
장개석은 일제와의 전쟁에서 한국 독립운동세력의 무장력이 중국에 이로울 것임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다. 강토가 없는 상황에서 무력으로 일본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력투쟁으로 외교적 성과를 가져왔고, 독립을 쟁취했다. 무력 투쟁이 가장 효과적인 외교수단이었다.
최근 뉴라이트들이 이승만을 평가하면서 외교독립론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는 힘을 바탕으로 할 때만 의미가 있으므로 군대가 없는 외교론은 무의미하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독립투사들은 국제정세를 활용하여 독립을 이루려 했다. 그들은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대표단의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3.1운동을 기획하였다. 만세운동은 우리 대표단의 외교 교섭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1919년 4월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것도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에게 ‘국가’ 대표라는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한국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1919년 6월 종료되었다. 그 후로도 외교적 노력을 통해서는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중국 등 어느나라에서도 승인을 받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외교를 통해 독립할 수 있다고 사기치며 호의호식만 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은 일제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었고, 국제사회에 한국민의 독립열망을 전달하여 말로 하는 무의미한 외교가 아닌 실질적인 효력이 있는 외교효과를 발생시켰다. 연합국의 한국 독립 결정,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지원도 무장투쟁을 함으로써 얻은 것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뉴라이트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나 국부라고 사기치는 것은 이승만이 매국노들의 똥개가 되어 뉴라이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 매국노들의 호의호식을 연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독립 투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해방은 김구를 포함한 무장투쟁세력이 외교적 성과를 얻어 이루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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