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는 북경 平谷區(당시 요동군)에서 건국

역사회복 2024. 5. 13. 11:07

 

광개토대왕릉비는 건국 도읍지를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라고 기술한다. 이 문구를 “비류곡 홀본 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웠다”라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러한 의미가 되기 위해선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이 아니라 ‘城於沸流谷忽本西山上’이 되어야 하므로 옳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구려가 漢의 부용 세력으로서 漢의 영토인 요동군 내에서 건국하여, 원천적으로 성을 쌓을 수 없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문자 그대로의 올바른 해석은 “비류곡 홀본 서쪽 성산 위에 의거하여 도읍을 세웠다” 이다. 당토명승도회(唐土名勝圖會) 순천부총도(順天府總圖)에 성산(城山)이 구수(泃水) 서쪽에 표

기되어 있다. 따라서 비류수는 구하이고, 비류곡 즉 홀본은 금해호(金海湖) 서쪽 구하 유역(지금의 平谷區)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도 고구려는 홀본부여이고 홀본은 요동의 가장자리에 있다고 하여 홀본이 요동군 내라 하고 있다. 『삼국사』도 추모왕이 비류수 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궁실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궁실을 짓지 않았고 산을 도읍으로 생각했다는 것도 독립된 세력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672년 이전에 열도에 도성이 없는 것도 열도에 백제로부터 독립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사』 백제 비류 시조설에 의하면, 비류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자고 했으며,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정착했다고 한다. 백제가 도읍한 韓 지역과 위에서 비정한 홀본은 남북으로 있으므로 비류 시조설의 비류 이동과 일치한다.

 

                                                                               [성산과 홀본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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