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조선총독부 기관지 역사비평사의 논문심사 거부

조성훈 선생님 투고논문에 대한 ‘부적합’ 판정과 반려 결정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는 조성훈 선생님이 2024년 3월 8일 『역사비평』에 투고하신 논문 「낙랑군은 보정시에 설치되었고 4세기 전반 고구려는 중국 영토를 탈취할 수 없었다」에 대해 간행규정(논문투고규정)에 따라 1차 심사를 진행하여 ‘부적합’ 판정을 내렸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여러 차례 『역사비평』에 논문을 투고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심사 결과 모두 ‘게재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모든 심사 결과를 공개하면서 『역사비평』 및 심사자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역사비평』에 논문을 투고하는 목적이 논문 게재 그 자체가 아니라, 심사서 공개 및 비난을 통해 『역사비평』을 공격하기 위함이라..

역사 2024.04.26

단군은 壇君이다

삼국유사는 단군을 제단 단(壇)자, 壇君으로 표기한다.제왕운기는 단군을 박달나무 단(檀)자, 檀君으로 표기한다.​신단수도 삼국유사는 神壇樹로 표기하고, 제왕운기는 神檀樹로 쓴다.​고조선 이전은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고조선도 단군의 명칭으로 보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제단 위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람이 임금이다. 따라서 檀君이 아닌 壇君이 타당하다. ​------학자이자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인 단재(丹齋)신채호(申采浩) 선생의 저서 ‘조선상고사’는 시종일관 제단 단(壇)자 ‘壇’君으로 기재하고 있다. 김용섭 교수도 ‘농업으로 보는 한국통사’에서 ‘壇’君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1920년대에 발행되던 동아일보 역시, 壇君으로 표기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 선생도 당시 동아일보 기고문..

역사 2024.04.08

왕검성은 낙랑군이 되었는가?

주석을 보시려면 첨부된 화일을 보셔야 합니다. 1. 서 『사기』와 『한서』에 의하면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는 다르다. 『한서』 「지리지」의 주석자들은 왕검성에 요동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즉 예맥조선이 망한 후 왕검성은 요동군 검독현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합리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그냥 우긴다. 최초로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시도한 이가 서영수이다. 그러나 서영수의 글엔 전혀 논리가 없어, 그의 글은 그냥 우기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본고는 왕검성과 낙랑군의 위치가 명백히 다름을 논증하고, 서영수 글의 유사사학성을 제시한다. 낙랑군 평양설이 왕검성 낙랑군설에 근거하고 있어, 왕검성 낙랑군설이 무너지면 낙랑군 평양설도 당연히 근거를..

역사 2024.03.14

유사학술지 역사비평에 낙랑군 논문 제출

https://taxecolaw.tistory.com/265 낙랑군은 처음부터 보정시에 있었고 313년에 이동한 적도 없다 (이정빈에 대한 반론) 1. 서 본고는 이정빈의 논문에 대한 반론이다. 이정빈은 낙랑군이 4세기 전반 대동강 유역에서 요서 지역으로 교치되었고, 5세기 전반 요서 지역에서 난하 유역으로 교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 taxecolaw.tistory.com 유사학술지 역사비평에 위 논문을 제출하였습니다. ​ 물론 그들이 게재하리라 생각은 않지만 게재 거부 과정에서 나타날 그들의 조선총독부 기관지성을 드러내기 위해 투고하였습니다. ​ 향후 그들의 심사문 등을 계속하여 올리겠습니다.

역사 2024.03.08

유사학술지 역사비평사의 이의신청에 대한 답변

예상대로 역사비평이 유사학술지로서 매국노의 주구라는 것을 자인하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 여러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강단유사사학을 끝까지 옹호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 개소리의 백미는 ​ "‘발해’의 문제는 단순히 단어가 빠져있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며, 투고자의 사료 이용 방법의 자의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 이 개소리는 이의신청 답변자가 멍꿀상태라는 것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술지의 편집 관련 사람이 멍꿀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의 지적 수준을 나타냅니다. ​ 사기 하본기에 대한 주석에서 인용한 괄지지 문구는 "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 皆邑落有人居, 屬百濟" 이고 ​ 사기 오제본기에 대한 주석에서 인용한 괄지지 문구와 한원이 인용한 괄지지 문구는 "百濟國西南海中有大島十五所, 皆..

역사 2024.03.07

"한국어 문법에 의한 톨카피얌 해독의 가능성 검토" 등재학술지에 게재 확정됨 (고대 타밀인은 한국인이다)

지금까지 톨카피얌은 해독되지 않고 있는데 우리말로 보아야 해독됩니다. 공지에서 알려 드렸듯이 제가 톨카피얌을 세계 최초로 해독한 책을 냈습니다. 물론 기존의 해독자들은 자기들이 해독했다고 주장하지만, 각 단어의 뜻과 문장에서의 역할을 밝히지 못하고, 단어의 뜻으로 내용을 추정한 것이므로 해독이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각 단어의 뜻과 문법적 역할을 최초로 밝혔으므로 저의 작업이 최초의 해독입니다. 물론 각 단어의 뜻은 기존 연구결과를 활용하였기 때문에 제 해독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고대 타밀어 서적을 한국어 문법에 의해 다시 해독하여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위 논문은 타밀인의 문법 문학서인 톨카피얌이 우리말로 읽어야 해독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제 톨..

역사 2024.02.24

고구려 수도의 변동

1. 서 고구려 수도를 알지 못하면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삼국사』는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 북부 지역에 있다가, 곧 점점 동으로 패수(浿水)의 근처로 옮겨갔다고 기술한다. 이는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은 역사가 아님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북경 동북쪽에서 건국한 고구려가 현도군을 정복한 14년부터 멸망 시까지 북경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고구려 멸망 시의 수도는 요양이다. 국내성은 현재의 집안에서 머나먼 서쪽의 천안시이고 한성은 현재의 평양이다. 국내성이 집안이고, 고구려 평양이 현 평양이라는 것은 개솔이며, 국내성과 현 평양은 고구려의 도읍인 적이 없다. 먼저 고구려의 실제 수도를 살피고, 강단유사사학 주장의 억지성을 살핀다. 2. 고구려 수도의 변동 1) 고구려의 건국지: BCE 37년, 홀본 = 북..

역사 2024.02.04

유사학술지 역사비평사에 이의신청서 제출

일제 잔재 선전지인 역사비평이 이의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확실합니다만 이의신청을 통한 그들의 답변에서 그들이 유사학술지임을 자백하게 될 것이므로 이의신청을 하였습니다. ​ --------------------- 저는 역사비평사가 일제 간첩들을 위한 학술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의신청 업무를 담당하시는 분도 해방 후 이승만이 매국노들의 앞잡이가 되어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일제 잔재들을 추종한 사람만이 역사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저의 글에 대한 심사자는 일제 잔재들입니다. 일제 잔재 논의를 떠나서도 기존의 견해와 다르다고 하여 무조건 게재를 거부하는 것도 학술지의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제 견해가 말이 안 된다면 다른 반박문을 통해서 저를 망신 주면 될 것입니다. 심..

역사 2024.02.03

역사비평사 사기꾼들의 심사문(게재거부) 공개('요동반도 백제와 대동강 원산만 선의 허구성'에 대한 심사문임)

2024년 1월 초에 투고한 다음 글에 대한 그들의 심사문입니다. https://taxecolaw.tistory.com/258 요동반도 백제와 대동강 원산만 선의 허구성 이 글은 역사비평사에 투고된 글입니다. 한글에서 복붙했더니 주는 다 지워졌습니다. 역사비평사는 이 글을 거부할 것입니다. 거부하면서 나타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사기성을 드러내기 위해 taxecolaw.tistory.com ​ 게재거부통지에 대해 반론하겠습니다. 심사자 1 ㅇ 󰡔사기정의󰡕 하본기 주석 이외에 󰡔사기󰡕권1 「오제본기」의 주석과 󰡔한원󰡕에서 인용된 괄지지에는 ‘발해’라는 단어가 빠져 있으므로 요동반도가 백제 영토였다는 것은 면밀한 검토를 요한다. ㅇ 반론: 괄지지의 ‘발해’라는 문구가 없어도 요동반도 백제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역사 2024.02.02

4세기 전반기에 고구려가 중국의 영토를 뺏었는가?

소위 낙랑군 교치는 조선총독부의 소설 조선총독부를 승계한 강단은 4세기 전반기에, 평양에 있던 낙랑군과 황해도에 있던 대방군을 고구려가 차지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하는 말로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교치이다. ​ 조선총독부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대동강 남쪽과 황해도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경우 뒤의 역사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없애야 했다. 그래서 찾다찾다 찾은 근거가 삼국사기 313년 10월 미천왕의 낙랑군 공격 기사, 314년 9월의 대방군 공격 기사, 313년 4월 이전 어느 시점이라 기술된 자치통감 장통의 모용외로의 귀부 기사이다. 그런데 장통의 귀부가 미천왕의 공격보다 더 이른 시기여서 말이 맞지 않는다. 또 삼국사기의 기사는 점령 기사가 아니고 공격 기사이며 포로를 잡아 귀환했음..

역사 2024.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