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樂良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연가(延嘉)7년’을 539년으로 보는데,​[7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본고에서 479년의 연호는 영화임을 밝혔다. 59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599년에는 북제, 북주, 수대의 조각양식이 등장하고 있어(곽동석, 『한국의 금동불 1』, 다른세상, 2016. 56쪽)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539년은 안원왕 9년인데, 안원왕으로의 승계 시 혼란으로 인해 연호의 사용이 늦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불상광배 뒷면에 ‘高麗國樂良東寺’가 새겨져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樂良’을 지금의 평양이라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듯이 6세기에 濼浪이 樂良으로 변하여 쓰여졌다면, 덕흥리고분과 안악3호분(동수묘)에 의해 고구려에 유주 濼浪郡이 있었음이 입증되므로, ‘高麗國樂良’은 고구..

역사 2024.06.05

강단의 永和十三年 사기질 (사마담에게 고마운 이유)

동수묘 묵서명은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으로, 나이 69세에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강단 사기꾼들은 영화13년을 사마담(동진 목제)의 연호로서 357년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담은 영화란 연호를 356년까지 사용하였고 357년에는 승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1. 고구려가 당시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던 남조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

역사 2024.06.03

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주 치소 광계와 지금 치소 연국은 낙양에서 2300리이다)

덕흥리고분 묵서명에서 후연 유주의 치소였던 광계와 후연의 수도였던 용성이 낙양에서 2300리라 한다. 즉 광계와 연국은 현재의 보정시 부근이다.  고구려는 후연을 정복하고 후연 남부에는 북연을 설치하여 위와의 완충지대를 만들었고, 서진의 유주와 평주 즉 당하에서 영정하까지의 후연 영토엔 고구려의 유주를 설치하여 영토화 하였다. 고구려 멸망 시까지 동성왕에게 탈취당한 시간 이외에는 이 영토를 유지하였고, 문자명왕 시에는 백제의 韓 지역까지 정복하였다. 강단사기꾼들은 평주의 낙랑군이 지금 평양이라 하는데, 서진의 유주 남쪽이 서진의 평주이고 평주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었다. 즉 낙랑군과 대방군은 낙양에서 2300리를 넘지 못한다. 지금 평양과 황해도는 낙양에서 5천리가 넘는다. 그들이 교치했다고 주장하는 요..

역사 2024.06.02

安平樂未央과 長樂未央

강단유사사학은 단동에서 발굴된 기와에 ‘安平樂未央(평안함과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이라는 문구가 발견되기 때문에 단동을 서안평이라고 하면서, '서안평에서의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 이라는 의미라 주장한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gskh_007_0040_0010_0090_0020] 林起煥安平 註 001 樂未央 註 002 安平 註 001 樂未央 註 002db.history.go.kr​기와의 길상구를 지명으로 전환하는 유사사학자들의 천재성은 유사역사학계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강단유사사학은 여대(旅大)에서 출토된, ‘長樂未央’명 와당에선 여대를 장이라는 도시로 보지 않고, 長樂未央(늘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 전체를 길상구로 본..

역사 2024.06.01

후한의 고구려에 대한 조공 중단 후

후한의 조공 중단으로 전쟁 발생전술하였듯이 대무신왕과 유수는 1세기 전반 낙랑군을 두고 1승 1패를 하였고, 모본왕은 CE 49년부터 후한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후한이 중기에 접어들며 초기 시행했던 북방예산을 조달하지 못하자 후한에 대한 불만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漢의 조공이 중단되자 105년 침입하였다.고구려가 111년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에 속하기를 구했고, 침입하였다는 것은 漢이 조공을 재개하라 요구한 것이고, 漢이 거부하자 바로 현도를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이러한 전후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하나가 잘못이라 판단하였다. 조공을 받지 못한 오환선비는 121년의 공격처럼 고구려와 공동작전도 하였다. 고구려는 후한과 주로 현도군을 두고 싸웠다. 현도군이 가장 국경과 가까웠고, 요동군..

역사 2024.06.01

살수대첩의 살수는 연태하

552년 양원왕은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은 586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당서』는 평양성은 장안이라 불렸다고 하고, 『고기』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므로 김부식은 두 성이 동일한지 다르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장안성은 평양과는 다르다. 중국인들은 고구려가 줄곧 평양을 수도로 하여 고구려의 왕이 있으면 평양이라고 불렀다. 장안성은 지금의 금주인데, 고구려가 중국 동북부의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평양(요양)이 너무 멀어 금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집안-요양-금주로 수도가 계속 서쪽으로 이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안성이 지금의 금주임은 수나라의 2차 침공에서 알 수 있다. 수나라 군사는 611년 탁군에 모였다. 수군은..

역사 2024.05.31

비류백제=예부여의 역사

후한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예부여는 한나라 바로 옆에서 건국하였으므로 후한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예부여는 49년부터 후한에 조공하였다. 예부여는 111년 낙랑군을 공격한 후 바로 귀부하고, 167년 현도군을 공격한 후에도 174년 바로 귀부하는데, 이는 예부여의 위치상 漢에 귀부하지 않으면, 漢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 선비 등 다른 세력에 의해 바로 점령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漢이 소국인 예부여를 놓아 두었던 이유는 다른 세력들을 통제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석괴의 지배단석괴가 그 영토를 3부로 나누어서 그 중 동부가 우북평에서 요동까지인데, 부여와 예맥과 접한다. 여기서 부여는 예부여이고, 예맥은 고구려이다. 단석괴는 영토 내 호수에 물고기가 많아서, 이를 식량으로 활용하기..

역사 2024.05.29

비류계(비류백제)는 황하의 이동으로 백제로부터 독립

동부여는 CE 22년 고구려에 의해 망했다. 비류계 세력은 BCE 6년 소서노 사망 시 온조계에 의해 숙청된다. 온조 정권에서 버림 받은 비류계 세력이 비류 후손을 중심으로, 대방고지(후에 대방군이 되는 지역)가 황하의 수류변동으로 황하에 의해 온조백제와 격리되자 독립하였다. 이들이 부여를 국호로 한 것은 당시 동부여가 망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비류백제의 건국은 CE 22년 이후이다. 『후한서』는 CE 49년에 부여가 조공한 후 해마다 사절이 왕래하였다고 한다.따라서 예부여의 건국은 22년에서 49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 추측할 수 있다.예부여가 본래 현토군에 속해 있었고 漢 말 공손씨에 복속했다는 것과夫餘王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을 현토군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王이 죽으면..

역사 2024.05.28

강유사사학은 중국 동부의 우리 역사를 부인하기 위해 백제유민을 부정한다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은 백제유민을 신라인 당인 송상 왜구 등으로 변조하여 숨기고 있다. 중국 동해안의 해상세력이 백제유민인 것만 밝혀져도 그들 소설의 한국사 날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백제유민 날조는 낙랑군 평양설, 후삼한 남한설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문제이다. 중국 동해안 백제가 부인되면, 번조선과 번한이 부인되고,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역사강역 전체가 왜곡된다. 백제유민의 역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국사이다.김성호는 노 키 나침반은 백제가 발명했고, 백제가 1세기에 노·돛·키의 3요소를 모두 구비한 노형해선(櫓型海船)을 만들었다고 보는데, 노·돛·키의 3요소를 가진 배는 백제 이전 중국 동해안을 지배했던 번조선인들이 발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韓에서 CE 9년 마한을 병합한 후 바로 요동..

역사 2024.05.27

백제유민에 대한 대응이 우열을 뒤집었다.

조선(고려)은 1389년 1396년 1419년 대마도의 정착지를 공격하여 힘을 보여주면서, 귀화 허용, 관직 부여, 삼포를 통한 무역 허용을 통해 이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포용하였다. 그러나 삼포왜란과 사량왜변 후 무역 규모를 줄이고 규제를 강화하여 이들을 실질적으로 격리하였다. 조선과 단절된 이들은 중국 동해안에서는 반상반구(半商半寇)가 되어 밀무역과 해적활동을 하고 여타 지역에서는 무역을 하며 일본의 해외무역상이 되었다. 1635년 일본은 해외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이들을 나가사키로 이주시켰는데, 1670년대에 이르러서는 나가사키 전체인구 약 6만 명의 6분의 1인 약 1만 명이 이들 무역상일 정도로 번성하였다. 나가사키의 백제유민은 흥복사를 중심으로 한 삼강방 (三江幇: 절강·강남·상서), 복제사를 ..

역사 2024.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