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유사사학이 기문을 남원, 대사를 하동이라 주장하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일본서기」의 반파, 기문, 대사 관련 부분은 열도의 마을국가 사이에 발생한 사실이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임나4현의 소속 변경도 동일한 성격의 행위이다. 임나4현이나 기문 대사 다사진의 마을국가간 이동은, 6세기 초 백제가 고구려의 열도 위성국으로부터 열도를 완전히 탈환한 후, 고구려계 지배하의 기존 마을국가들간 역학관계를, 백제의 지배에 편하도록 재편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일본서기」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ㄱ) 513년 6월
그리고 따로 “반파국(伴跛國)이 신의 나라의 기문(己汶)이라는 땅을 약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바르게 판단하여 원래 속한 곳에 돌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ㄴ) 513년 11월
겨울 11월 신해삭 을묘(5일), 조정에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 안라(安羅)의 신이해(辛已奚) 및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伴跛)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 칙명을 알리고,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ㄷ) 513년 11월
같은 달, 반파국이 집지(戢支)를 보내어 진보를 바치고 기문의 땅을 청하였으나, 결국 주지 않았다.
(ㄹ) 514년 3월
3월, 반파가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고, 만해(滿奚)와 연합하여 봉수와 저각(邸閣)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 또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 추봉(推封)과 연합하여, 군사와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였다. 남녀를 포로로 삼고 마을을 노략질하니, 습격을 받은 곳은 살아남은 자가 드물었다. 포악함이 지나치게 과하며 사람을 괴롭히고 마구 학살하니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ㅁ) 515년
9년 봄 2월 갑술삭 정축(4일), 백제 사자 문귀 장군 등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칙을 내려 물부련(物部連;모노노베노무라지)[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을 딸려 보냈다[『백제본기』에서는 물부지지련(物部至至連;모노노베노치치노무라지)이라고 하였다.]. 같은 달, 사도도(沙都嶋)에 이르러 반파의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강한 힘에 의지하여 잔혹한 짓을 일삼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물부련은 수군 5백 명을 이끌고 바로 대사강(帶沙江)으로 나아갔다. 문귀 장군은 신라를 거쳐 백제로 들어갔다. 여름 4월, 물부련이 대사강에서 머문 지 6일 되었을 때 반파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옷을 빼앗기고 가진 것을 약탈당하고 막사는 모두 불탔다. 물부련 등은 두려워 도망가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문모라(汶慕羅)[汶慕羅는 섬이름이다.]에 머물렀다.
(ㅂ) 516년 9월
가을 9월, 백제가 주리즉차(州利卽次) 장군을 물부련에게 딸려 보내어 기문의 땅을 준 것에 감사하였다.
(ㅅ) 529년 3월
23년 봄 3월, 백제왕이 하다리의 국수(國守) 수적신압산에게, “조공하는 사자들이 항상 해안의 험한 절벽[해안의 들쑥날쑥한 험한 절벽을 말한다. 세간에서 미사키(美佐祁)라고 한다.]을 피해 다니며, 바람과 파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물품들이 물에 젖어 모두 망가지고 못쓰게 된다. 청컨대 가라의 다사진(多沙津)을 신(臣)이 조공하는 통로로 삼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압산신(押山臣)이 청에 따라 (천황에게) 주상하였다. 같은 달, 물부이세련부근(物部伊勢連父根;모노노베노이세노무라지치치네)과 길사로(吉士老;키시노오키나) 등을 보내어 진을 백제왕에게 주었다. 이에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 진은 관가(官家)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칙사인 부근(父根) 등은 이에 그 자리에서 주기가 어렵다고 여기고 큰 섬으로 돌아가서, 따로 녹사(錄史)를 보내어 마침내 부여(扶余)에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가라는 신라와 우호를 맺고 일본을 원망하였다.
국수(國守)는 백제 관료인 왜왕 소속의 지방관료로 추측된다. 백제라는 마을국가가 이득을 보는 것은 이들이 韓이나 한반도의 본국백제로부터 와 본국백제가 이들을 다른 마을국가들보다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기문은 백제(열도의 마을국가, 이하 ‘백제마을’이라 한다)의 영토였다가 고구려계의 지배 시 반파마을의 영토가 되었고, 6세기 초 백제가 탈환하자 다시 백제마을의 영토가 된다. 왜왕(열도백제의 최고관료)이 513년 기문을 백제마을의 관할로 변경할 때 체사도 함께 백제마을의 관할로 한다. 그러자 514년 반파마을이 마차해마을 추봉마을과 함께 왜왕에게 반항하여 신라마을을 침략한다. 515년 왜왕이 물부련을 책임자로 군사 500명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백제마을의 사자는 신라마을을 거쳐 백제마을로 돌아갔다.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어 516년 백제마을은 기문을 받은 것에 대해 왜왕에게 감사하였다. 529년 백제마을은 가라마을의 다사진도 백제마을의 관할로 받았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이러한 열도의 이야기를 한반도 남부에서 있었다고 주장하는 임나(가야)와 백제의 이야기로 날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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