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문과 대사를 각각 남원과 하동으로 보는 주류 강단유사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한다.
백제의 남방경영과 대가야의 西進政策이 부딪쳐서 대가야와 백제는 「己汶」을 놓고 영역을 다투게 되는데, 당시에 기문은 대가야에 속해 있었다. 이 사실은≪백제본기≫를 토대로 하여 개작된 듯한≪日本書紀≫소재의 사료에 보인다. 여기서의 기문은 가야 계통 국명의 하나로서 ≪新撰姓氏錄≫ 吉田連條에 上·中·下의 3기문이 나오고, ≪梁職貢圖≫ 소재의 百濟旁小國 중에 상기문이 나오며, ≪삼국사기≫ 樂志의 우륵 12곡명 중에 상·하의 奇物이 나온다. 기문은 상·하 또는 상·중·하로 나뉘는 것으로 보아 넓은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남원(옛 지명 古龍郡) 및 임실(옛 지명 任實郡 居斯勿縣)지방으로 비정된다.
그들이 근거로 든 「신찬성씨록」은 기문이 아니라 파문(巴汶)이라 하며 임나의 동북에 파문이 있다고 하므로, 파문과 기문이 같다고 하더라도, 남원이나 임실과 하동이 임나의 서쪽 경계가 된다는 그들의 주장과 모순된다. 『양직공도』는 상기문이 아니라 상사문(上巳文)이라 하므로 그들 주장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바꾸는 것에 비하면, 巴와 巳를 己로 바꾸는 것은 바꾸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음상사를 통해 역사를 발견하므로 문헌이 음상사를 방해하면 그 문헌은 오류가 되어 교정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들은 반파를 임나로 간주하고 상기문이 임나에 속하는 땅이라 보는데, 이는 상사문을 반파와 동일하게 방소국으로 열거하는 『양직공도』와 모순된다. 『한원』의 基汶河를 섬진강으로 보아 섬진강 유역인 남원이 기문이라 하기도 한다. 基汶과 己汶은 한자가 다르다. 훈으로 읽는다면 발음이 달라질 수 있다. 기문하가 있다고 하여 그 유역에 기문이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또한 대사와 다사진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고 주장할 때는 섬진강을 대사강으로 보므로 그들의 주장을 학술적 음상사라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처절하게도 우륵12곡의 곡명으로부터도 어떤 근거도 없이 12곡중 상기물(上奇物)은 남원, 하기물(下奇物)은 장수 임실 지역이라 한다. 그러나 기물과 기문이 음상사도 아니다. 물론 백제의 남방경영과 가야의 서진정책이 기문에서 충돌했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그들의 소설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상 반파는 임나가 아니므로 반파의 기문 대사를 근거로 임나의 영역을 확정할 수 없다. 또 가야는 백제의 부용국이 아니었는데, 『양직공도』가 반파가 백제의 부용국이라 하므로 반파가 임나가 될 수는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반파가 임나=가야라 하나, 「일본서기」에 반파마을이 임나마을인 증거는 전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가라마을의 다사진이 반파마을의 대사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서기」에 의하면 다사진과 대사는 같을 수가 없다. 우선 가라마을과 반파마을의 이름이 같지 않다. 반파마을이 가라마을이라는 증거는 없다. 또 백제마을이 반파마을로부터 516년 경에 기문만 받고 대사를 받지 못했다면, 529년에는 백제 관료인 왜왕에게 “반파마을이 아직도 주지 않고 있으니 반파마을을 혼내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백제마을은 “조공하는 통로로 쓰게 하여 달라”라고 새로운 명분을 제시하고, 가라마을도 “이 진은 관가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한다. 다사진이 불과 10여년 전에 백제마을로 귀속된 왜왕의 결정이 있었다면 백제마을과 가라마을의 언급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따라서 반파마을과 가라마을은 다른 나라이고, 다사진과 대사는 다른 곳이다. 또 515년 백제마을의 사신은 물부련과 함께 사도도에 이르렀으나, 반파마을의 반란으로 인해 바로 백제마을로 돌아가지 못하고 신라마을을 거쳐 백제마을로 귀환한다. 사도도를 거제도로, 대사강을 섬진강으로 보는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호위하는 물부련 군사들과 떨어져야 하고 가야의 해안을 따라 한참을 가야만 신라의 해안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문, 대사, 다사진을 열도의 지명으로 보아야 하며, 관련된 「일본서기」의 백제, 안라, 반파, 만해, 마차해, 추봉, 신라, 사라, 가라는 열도의 마을국가의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가 그들 억지의 근거가 안 되니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신찬성씨록」과 『양직공도』의 글자를 날조하고, 심지어 우륵 12곡의 곡명까지 지명으로 날조하고, 그래도 음상사조차 성립하지 않으니, 가짜 음상사를 음상사라고 우긴다.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그들의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심만을 근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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