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임나4현 전남설=강단유사사학이 밝힌 고인류학 고생물학의 성과

역사회복 2024. 6. 29. 22:46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 512년 이야기를 전라남도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여 임나4현의 위치를 비정한다. 그들은 주장자마다 음상사학에서 일가를 이루어 서로 다른 위치를 주장하고 있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음상사를 통해 임나4현을 경남, 전북, 충남, 경북, 전남, 부산 등 다양한 위치에 비정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주로 섬진강 유역의 전남 동부지역으로 비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현을 군단위 이상으로 보아 4현을 4군 이상의 영역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원문은 임나4현을 아주 작은 마을로 보고 있다. 이들이 근거로 하는 「일본서기」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 512년 12월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任那國)의 상다리(上哆唎), 하다리(下哆唎), 사타(裟陀), 모루(牟婁) 4현을 청하였다. 다리국수인 수적신압산이 아뢰기를, “이 4현은 백제에 근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 4현은) 아침저녁으로 내왕하기 쉽고 닭과 개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백제에 주어 같은 나라로 합치게 한다면, 굳게 지키는 대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합쳐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따로 떨어져 있다면 몇 년도 제대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반금촌대련(大伴大連金村)도 이 말을 믿고 뜻을 같이하여 상주(上奏)하였다. --- 대련은 그 청에 따라서 사자를 바꾸어 칙을 알렸다. 하사품과 칙명의 뜻을 전하고, 상표에 따라 임나 4현을 주었다.

 

원문이 ‘(백제와 4현이) 아침 저녁으로 내왕하기 쉽고 닭과 개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므로, 백제나 임나4현이나 모두 아주 작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의 이 부분은 아침저녁의 왕래와 닭과 개를 명시하여 열도 마을국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데, 초탈문헌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임나4현을 한반도의 광대한 지역에 위치시킨다. 김태식은 임나4현을 순천, 광양, 여수로 비정한다.

 

결과적으로 백제가 임나 4현을 빼앗은 것이니, 원래는 그 곳이 임나, 즉 가야의 영역에 속하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이 임나 4현의 위치는 섬진강 유역의 전남 지역에 해당하여, 상·하다리는 전남 여수시와 돌산읍, 사타는 전남 순천시, 모루는 전남 광양시 광양읍에 비정된다. 여기서 다리국수란 그 해 4월에 왜에서 이 지역으로 파견했던 사신을 가리킨다.

 

김태식은 개와 닭을 어느 나라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하므로 임나4현이 작은 지역이라고 말하면서도 광양, 순천, 여수 지역을 임나4현이라 주장한다. 당시에는 순천에서 닭이 지나가면, 그 닭이 광주 닭인지 여수 닭인지 순천 닭인지 하동 닭인지 몰랐다. 그렇게 활동범위가 컸던 우리의 닭과 개가 현재 전해지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닭과 개는 과장법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 하여도 임나4현의 1현이 1군은 될 수 없으며, 「일본서기」가 일본왕의 하사 지역을 일부러 작게 과장했다는 것도 「일본서기」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닭과 개로 유사사학 취급 받으니 되는 대로 지껄이면서 유사사학에 헌신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임나4현을 일제유사사학을 조금 더 추종하여 전남 전체라고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도가 김태식보다 약간 크기 때문이다. 다른 학술적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백제 관료인 왜왕이 백제 출신 사람들의 마을국가에게 임나 마을국가의 일부를 주어 왜왕에 대항하는 세력의 부상을 막고 마을국가들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해 열도 통치의 편의를 도모한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이고 한반도 남부와는 무관하다. 임나4현에선 그들의 유일한 근거인 음상사도 포기된다. 「일본서기」 원문에 의하면 작은 지역에서 네 유사한 지명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있을 리 없으므로 닭과 개의 활동범위를 무한히 확장시키고, 임나4현의 사람들을 축지법을 쓰는 도사들로 만들어버린다. 당시의 전남 사람들이 축지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세계 최초로 발견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임나4현이 광대한 지역이라면, 그러한 광대한 지역이, 그들의 소설에 의할 때, 마한에서 임나=가야의 영역으로 변하였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400년에 고구려에게 망한 임나=가야가 고대국가도 아닌 연맹체로서 고구려를 몰아내고 그들 소설상, 백제의 영향권 내에 있었던 마한을 점령하였는지를 밝혀야 한다. 역사적 맥락이 전혀 없는 이야기를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하여 마음대로 지껄이다가, 유일한 근거인 음상사도 포기한 채, 임나 4현이 전남의 광대한 지역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일제가 날조한 야마토임나설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충성심을 상정하여야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