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本은 선조(근본)를 의미하며, 任那加良의 加良은 음을 가라로 볼 수 있는데, 가라는 구루=城=마을=국가의 뜻이고 일족 친족 혈족 동족 등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이 문구를 “신은 본래 임나가야 사람입니다”라고 해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강수가 말한 임나가량이 가야의 고령이나 김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강수의 부 석체는 신라의 관직인 나마를 지냈다. 강수는 신문왕(재위 681-692년) 때 사망하므로 강수의 나이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강수는 가야가 멸망한 지 한참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고령이나 김해 사람들이 충주로 이주된 것은 6세기 중엽이다. 이주 후 적어도 50년이나 지난 후에 태어난 강수가 자신을 본래 고령이나 김해 사람이라고 할 리는 없다. 만약 강수가 말한 뜻이 강단유사사학이 말한 뜻이라면 강수는 반역죄로 처벌될 수도 있다. 가야가 망한 후 한참 후에 가야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으며, 그 아버지가 신라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 신라 왕에게 자신을 망한 가야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本은 선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本을 선조를 의미하는 글자로 해석하더라도 임나는 고령이나 김해가 될 수 없다. 강수의 선조가 고령이나 김해 출신이더라도, 왕에게 가야가 존재할 당시의 지명을 들먹이는 것은 신라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줄 수 있으므로, 강수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고령이나 김해의 신라지명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나가 신라나 신라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강수는 그 선조가 임나국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강수 아버지의 이름이 석체(昔諦)이고, 따라서 강수의 성이 昔이라면 강수의 선조는 신라에서 열도로 건너갔던 신라의 석씨 집단이 나중에 다시 신라로 되돌아온 경우로 보인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열도로의 이동이 주가 되었지만, 진경대사와 강수의 사례로부터 열도에서 한반도로의 이동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이 本을 본래라고 사기치는 이유는 本을 선조라 하면 강수의 선대가 고령이나 김해에서 충주로 이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고령이나 김해가 임나라는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충주로 이주된 고령이나 김해 출신의 사람들의 선조의 고향이 모두 고령이나 김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임나가 가야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오역도 서슴치 않는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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