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앞에서 『삼국사』,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석이정전』과 『석순응전』 등 객관적 사료에 의해 3세기 말 토착세력이 김수로계로부터 가야 왕권을 탈취하였음을 입증하였다. 그런데 강단은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추종하기 위해 어떤 근거도 없이 가야사를 난도질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야사를 구분하고 있다.
문헌상으로 보아 「가야」라는 이름을 쓰는 국가는 둘이 있다. 400년경까지는 김해의 가락국이 가야라고 칭하였고, 5세기 후반 이후로는 고령의 대가야국이 가야라고 칭하였다. 고고학적으로 보아 4세기 이전의 문화 중심은 김해지역이고, 5세기 이후의 문화 중심은 고령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일단 4세기 이전을 전기 가야시대, 5세기 이후를 후기 가야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김해 駕洛國(狗邪國·本加耶) 중심의 전기 가야시대에 고령지역 소국의 국명은 伴跛國(半路國)이었던 듯하며, 고령 대가야국 중심의 후기 가야시대에 김해지역 소국의 국명은 南加羅國(南加耶國) 또는 금관국이었다.
전기 가야사는 1∼4세기 동안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한 경남해안 및 낙동강 유역의 변진 12국의 역사를 말한다. 이 시대를 세분하면, 철기를 수반하는 토광목관묘 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경까지를 가야문화 기반 형성 시기로 볼 수 있고, 토광목곽묘 문화가 형성되는 기원후 2세기대를 加耶 諸國 성립 시기, 3∼4세기는 김해지역의 우월성이 드러나는 전기 가야연맹 시기이면서 가야문화의 전성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성기의 말미인 400년경에 국제관계에 휘말려 중심 소국들이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단 멸망함으로써 전기 가야연맹은 해체되었다.
후기 가야사는 5∼6세기 동안 고령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경상 내륙 및 낙동강 西岸 10여 소국들의 역사를 말한다. 그 시대를 세분하면, 수혈식 석곽묘 문화가 각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5세기 전반기를 가야제국 복구 시기로 볼 수 있고, 5세기 후반부터 520년대까지는 고령 대가야의 우월성이 두드러지는 후기 가야연맹 시기이면서 가야문화의 중흥기로 볼 수 있다. 520년대 후반 이후는 가야연맹이 소멸과정을 겪는 시기이니, 그 중에서도 530년대는 신라·백제의 침투로 인하여 남부지역의 일부 소국들이 멸망하는 시기, 540년대는 대가야(고령)·안라(함안)의 南北二元體制로 분열된 시기, 550년대는 백제의 부용체제로 들어간 시기였다. 그러나 백제의 관산성 패전 이후 562년에 대가야국이 신라의 공격으로 함락되면서 후기 가야연맹은 종식되었다.
이것은 결국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종합하여, 가야의 정치적 전개과정을 기준으로 삼고 사회·문화의 발전단계를 고려하여 구분한 것으로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전기 가야시대 ① 가야문화 기반 형성기: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경.
② 가야 제국 성립 시기:2세기.
③ 가야연맹 전성기:3∼4세기.
후기 가야시대 ④ 가야 제국 복구 시기:5세기 전반.
⑤ 가야연맹 중흥기:5세기 후반∼520년대.
⑥ 가야연맹 소멸 시기:530년대∼562년.
아무런 증거도 없는 전기가야와 후기가야의 구분
강단유사사학은 전기가야연맹이 400년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해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증거는 전혀 없다. 가야가 연맹체라는 근거도 전혀 없다. 고구려는 400년 열도를 공격했지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공격한 적이 없다. 그들은 고구려가 전기가야를 멸망 시켰다고 하는데 가야 지역에선 고구려의 유적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열도에선 고구려계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된다.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조가 거의 완벽히 인위적으로 지워졌다는 것이 열도가 정복당했다는 것을 암시함에도 그들은 모른 척 한다. 그들은 가야가 망한 후 어떻게 후기 가야가 성립했는지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은 『삼국사』,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술된 3세기 말의 권력 변경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의 소설에선 나라가 갑자기 망했다가 갑자기 다시 만들어진다. 고구려가 얼마나 가야를 지배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고구려를 어떤 정치체가 어떤 방식으로 물리치고 후기 가야를 성립시켰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부합하는 말만 늘어놓으면서 가야의 역사라고 사기를 친다.
가야는 연맹체가 아닌 고대국가
『삼국유사』는 가야 건국기사에서 나라 이름을 대가락이라 한다. 대가야는 가야의 수도와 가야국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김해가 수도인 시기에는 김해가 대가야이고, 3세기 말 이후 고령이 수도가 되어 고령이 대가야가 된다. 강단유사사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가야를 연맹체라고 주장하나, 전술하였듯이, 가야에 관한 모든 객관적 사료가 주(主) 즉 지방관과 王을 구별하고 있으므로, 연맹체라는 주장은 그들의 소설에 불과하다.
강단유사사학이 가야를 근거 없이 제국(諸國 여러 나라)이라 하는 것은 열도의 마을 국가들이 백제에 지배 당하는 것을 기록한 「일본서기」의 내용을 야마토왜가 한반도의 가야를 지배하는 것으로 날조한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떠받들기 위함이다.
가야가 변진 12국이나 낙동강 서안 10여 소국과 관련된다는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변진은 변한과 진한이 합병한 韓의 신라를 말하므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는 완벽하게 관련이 없다. 낙동강 서안 10여 소국은 그들의 소설에 등장하는 나라일 뿐이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임나=가야 날조를 위한 6세기 가야사 구분
위 인용문에서 강단유사사학은 530년대는 신라·백제의 침투로 인하여 가야의 남부 소국들이 멸망하며, 540년대는 대가야(고령)와 안라(함안)의 南北二元體制로 분열된다고 하며, 550년대는 가야가 백제의 부용체제로 편입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료에 전혀 근거가 없는 그들의 소설이다. 백제는 가야와 우호적이었고, 530년대에 백제가 가야를 침략한 적이 없다. 안라국이 한반도 남부에 있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고, 가야에서 이탈하여 병립한 증거도 전혀 없다. 550년대 가야가 백제의 부용국이 된다는 증거도 전혀 없다. 가야는 557년에 멸망하므로 부용체제로 변화될 시간조차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도대체 가야사에 관한 한 강단유사사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하고 있다. 왕망 세력의 축출, 42년의 가야 건국, 47년의 보주 허씨 집단의 강제 이주, 48년 김수로와 허황옥의 혼인이 객관적 사료에 의해 명백함에도 가야가 2세기에 성립한다고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의 건국 시기를 사기 치기 위해, BCE 1세기부터 CE 1세기를 가야문화의 기반형성기라 하는데,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알 수 없다. 가공의 야마토왜 정권을 인정하고 열도의 우리 역사를 부정하여, 조선총독부의 소설을 유지하려는 그들의 가련한 시도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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