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강단유사사학이 멋쩍어서 날조한 창녕비 관경비설

역사회복 2024. 6. 9. 03:12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임나의 멸망에 대해 뜬금없이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참고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갑자기 창녕비를 들고나온다. 그들은 창녕비에 순수관경이라는 문구는 없어도 창녕비를 척경비(拓境碑)나 순수관경(巡狩管境)비로 볼 수 있어, 창녕이 당시 가야와 국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흥왕이 창녕까지 巡守해 와서 軍勢 시위를 하고 일련의 사면조치도 취하였고, 이는 가야연맹 제국에 대하여 위협과 유화의 시위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녕비문 어디에도 순수관경이라는 문언이나 척경이라는 문언이 없다. 창녕비 어디에도 군세 시위를 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의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① 제목[題記] ② 순수배경과 경과[紀事] ③ 왕을 수행한 사람[隨駕人名列記]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창녕비는 이들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 농토 산림 소금 하천 등 경제 관련 업무분장이 나오고 참여자가 기록되었다. 창령비는 경제 관련 업무분장에 관한 진흥왕의 교시이다. 진흥왕 시 영토의 급격한 확대로 경제 관련 업무분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550년 도살성과 금현성을 확보하였고, 551년 고구려 10군을 획득하였고, 553년 백제의 동북부를 탈취하였고, 전술한 바와 같이 555년 가야의 합천, 557년 가야의 고령을 점령하였다. 이후 553년 백제로부터의 점령지에 신주를, 555년 합천에 완산주를, 556년 비열홀주를, 557년에 국원소경 감문주 북한산주를 설치하는 등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개편 과정에서 경제 관련 업무분장에 불명확한 부분이 생겨서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창녕에 비를 세웠다. 가야가 이미 망했는데 가야에 군세 시위를 할 이유도 없으며, 당시 신라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에게도 대등하게 대항하고 있었다. 가야가 망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마을국가로 쪼그라든 가야에 군세 시위를 하였다는 것은 우습지도 않은 소설에 불과하다. 일제유사사학에 충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561년에도 가야=임나가 있었고 강력했다고 날조하면서 창녕비를 문언과 달리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그들의 놀라운 충성심과 날조력은 유사사학의 영원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